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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감시받지 않을 권리

문수정 산업부 차장


평생 잊지 못할 취재를 한 적이 있다. 느닷없이 시력을 잃고, 언어를 잃고, 몸의 움직임을 잃고, 의식을 잃게 된 중학생 아이에 대한 취재였다. 취재원은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날의 흐릿했던 창밖 풍경, 꼭 잡고 있던 전화기의 촉감, 담담하고 단단했던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던 공기의 질감까지 고스란히 기억이 난다. 그날 나는 몇 시간을 오열했다. 수화기 너머 어머니는 우는 대신 스스로를 붙들고 있었다.

아이의 사연은 기사로 나왔다. 병명조차 찾아내지 못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제대로 된 치료는 물론이고 정부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인 열다섯 살 박채원양의 이야기는 2014년 보도됐을 당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보도 이후 대부분의 방송사에서 내게 연락을 해왔다. 채원이 어머니의 연락처를 묻는 전화였다. 당시 기사에는 채원이뿐 아니라 같은 병실에 있는 난치병 아이들의 이야기도 조금 담겨 있었다. 방송사마다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이 건과 관련해서도 채원이 어머니와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기사에는 싣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마음에 박혀 있는 이야기가 있다.

난치병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아이 사연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병원비가 턱없이 부족해도, 아이가 겪는 일을 가족이 감당하기에는 처절할지라도 그렇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 지점으로 모인다. 도움을 받으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도움은 없다고, 세상은 그런 곳이라고 한다면 언뜻 수긍이 간다. ‘병을 이겨내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나 ‘받은 만큼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아야 하는 것’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대가는 그런 게 아니다.

도움을 받은 대가로 이들을 따라다니는 건 ‘일상의 감시’다. 돕는 손길이 늘어나는 만큼 보는 눈이 많아진다. 눈길과 눈길이 감시로 이어지고, 수군거림으로 퍼져나간다. “TV 나와서 기부받더니 가족들이 소고기 먹으러 다닌다더라.” “그 집 첫째가 병원에 누워있는데 둘째한테 새 가방을 사줬다지 뭐야.” “애가 아픈데 그 엄마 옷 잘 입고 다니는 것 좀 봐.” 알고 보면 칠순을 맞은 할아버지와 조촐한 식사로 칠순 잔치를 갈음한 건지도 모른다. 첫째를 돌보느라 소홀했던 둘째에게 새 가방으로 미안함을 전한 것일 수 있다. 매일 병원에서 아픈 아이를 돌보며 우울의 늪으로 떨어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평범했던 일상의 의상을 걸친 건지도 모른다.

도움을 받았다고 병원비가 아닌 다른 곳에 돈을 쓰게 된 사유를 일일이 설명하고 다니는 건 구차할 뿐 아니라 불필요하다. 힘든 와중에 어쩌다 소소한 이벤트처럼 평범한 하루를 보내봤다고 구구절절 해명하고 다닐 일은 아니다. 그런 대가를 치르지 않기 위해, 아프지 않은 가족들만이라도 평범한 삶을 애써 이어가기 위해, 그렇게 환자와 간병인 모두 일상의 리듬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도움을 거절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오지의 소방관을 돕는 ‘히어, 히어로(Here Hero)’ 캠페인을 이끌어 온 홍윤희 이베이코리아 이사는 휠체어를 타는 아이의 엄마다. 지난달 홍 이사를 인터뷰했는데 이런 일화를 들려줬다. 아이와 함께 다니면 “쯧쯧” 하고 혀를 차며 1000원짜리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홍 이사는 “그럴 때마다 종이에 벤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그런 무신경은 가늘지만 진한 상처를 남긴다. 피가 뚝뚝 흐르지는 않지만 슬금슬금 배어 나온다. 아리게 아프다. 아이가 휠체어를 탄다고 아이의 평범한 외출을 1000원짜리 취급해도 되는 건 아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다. 그러므로 어려운 이들을 도울 때는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응원해줬으면 좋겠다. 관심을 빙자한 감시나 값싼 동정을 휘두르지 않도록 조심했으면 좋겠다. 그들에겐 감시나 동정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 인간의 존엄은 그렇게 지켜지는 것 같다.

문수정 산업부 차장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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