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중에 돼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우르르 창문 밖을 바라보니 우이천에 돼지 몇 마리가 떠내려오고 있었다. 여름 장마였다. 우이천과 중랑천 합수 지점인 서울 장위동 일대는 상습적으로 침수되곤 했다. 1970년대 중반 서울 남대문중학교 국어수업 시간 때의 일이다. 서울역 옆 봉래동에 있던 학교는 1969년 변두리인 장위동으로 이전했다.

당시 서울 동숭동 서울문리대 정문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 가는 건 고역이었다. 만원 버스가 미아리고개, 장위동고개를 넘어서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파김치였다. 장위동은 가난한 동네였다.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이 깔리지 않은 길들이 많았다. 장마철이면 장화 없이는 살기 힘들었다.

그날 국어 시간에 파리한 얼굴의 선생님은 모 신학대 교수들이 군부독재에 항거해 삭발한 얘기를 했다. 신앙의 양심을 지키려는 용기라고 했다. 슬퍼하던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무렵 나는 교회 중고등부 교사 인솔 아래 서울 상암동 샛강 빈민촌에 선교 봉사를 다니곤 했다. 그래서 그 얘기가 유난히 귀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학교 밖은 지옥이었다. 이웃한 K공고 야간부 형들이 골목에 지켜서 우리를 어찌나 괴롭히던지 버스비까지 다 빼앗겨야 했다. 이유 없이 맞는 것은 기본이었다. 더구나 K공고는 같은 재단 학교였다. 우리가 학교폭력을 당한 주된 이유는 사대문 안에 산다는 되지도 않은 이유에서였다.

어느 날 또 깡패들이 막아섰다. 내 가방에서 상암동교회 주일학교 발표회 등사물이 나왔다. 그들은 “내가 예수다 인마. 교회 낼 돈은 있고 내게 줄 돈은 없어” 하면서 때렸다. 시내 중심의 1학군 학교 중 최악의 배정을 받은 우리는 더 서러웠다. 사대문 안에 살던 국회의장 아들 동창은 체력장 시험 대비 ‘모의 수류탄던지기’ 시간에 수류탄에 머리를 맞아 의식불명이 됐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아닌 ‘장위동 잔혹사’였다.

중랑천은 교회사적으로 갈릴리와 같은 곳이었다. 서울이 급팽창하던 1960~70년대 서울 동부의 중랑천을 중심으로 자고 나면 집들이 생겼다. 움막, 비닐집, 판잣집, 슬래브집 등 무허가 빈민촌이 형성됐고 당국과 철거 마찰로 늘 전쟁터 같았다. 도봉구 창동에서 청계천과 합수 지점인 한양대 뒤까지 중랑천 20㎞ 제방 좌우로 도시 빈민과 서민의 주택가가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버린 오물과 공장 폐수로 인해 중랑천은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죽은 하천이었다. 극도로 가난한 이들은 둑에 토굴을 파고 앞부분만 비닐을 덮어 살아갔다. 이 모습이 ‘북괴’ 전단에 활용됐다. 이들은 도시노동자나 식모살이로 살아갔다. 청계천 봉제 공장은 그들의 주된 일터였다. 그럼에도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 14:28)는 말씀처럼 고통받는 자들에게 손 내미는 성령의 은사가 있었다.

중랑천 빈민선교의 획을 그은 이는 ‘새벽을 깨우리로다’로 알려진 김진홍 전도사였다. 답십리, 전농동, 장한평 등에 활빈교회를 세우고 교육을 했다. 그는 다섯 번의 강제 철거에도 힘없는 자들을 지켰다. 한데 1974년 김 전도사가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수감됐다. 성도들은 이듬해 40일 철야 금식기도를 시작했고 그 기간 중 김 전도사가 13개월간의 수형생활 끝에 풀려났다. 그는 “내가 박정희를 이겼다”고 소리쳤다. 그의 갈릴리 사역은 거기까지였다. 자기 의의 시작이었다.

이보다 앞서 1960년대 말 갓 스무 살 청년 전태일이 중랑천과 도봉천 합수 지점 백사장에 어머니 등과 함께 버려졌다. 1967년 시내 남산동 판자촌에 대화재가 발생해 30여명이 죽고 30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정부가 전태일 가족 등 이재민을 창동 일대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백사장에 버린 것이다. 이때 독립운동가 박현숙 장로 등이 이들을 위해 창현교회(현 갈릴리교회)를 세우고 신앙 안에서 일어서게 했다. 그 교회 청년 전태일은 공장 동생들에게 빵을 사주고 버스비가 없어 청계천 봉제 공장에서 쌍문동 집까지 걸어 다니곤 했다. 전태일은 중랑천 옆 공동묘지 자리 교회에서 예수의 삶을 배우고 노동운동가가 됐다.

요즘 중랑천 옆 장위동 한 교회 목사의 정치적 사역으로 인해 교계가 시끄럽다. 그가 목회하는 장위동 재개발 지역의 교회 부지가 수백억원대다. 이 소요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다만 갈릴리를 향한 그의 처음이 끝과 같기를 바란다.

전정희 뉴콘텐츠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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