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 미사’ 악보를 들고 있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초상화. 독일 화가 요제프 카를 슈틸러가 1820년에 그렸다. 국민일보DB

올해 음악계 최대 키워드는 단연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다. 사실 기념을 하는 것이 새삼스러울 만큼 우리는 이미 베토벤의 세계에 푹 빠져 산다.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연주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그의 음악을 듣기 위해 콘서트홀을 가거나 음반을 일부러 찾을 필요조차 없다. TV를 켜면 식기세척기 광고에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이 흘러나오고, 야구 중계 사이에 반복되는 온라인 게임 광고의 배경음악은 저 유명한 베토벤 ‘합창’ 교향곡 4악장이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한때 쓰레기 수거차가 후진할 때 울리는 신호음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이런 현상은 생전의 베토벤이 음악들을 작곡한 그 순간부터 대체로 비슷했다. 선배 작곡가 바흐나 모차르트의 음악들은 동시대에 잠시 연주되고 난 후 역사 속에 묻혔다가 후세들의 발굴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베토벤의 작품엔 ‘발굴’이란 단어가 필요 없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사람들은 그의 작품들을 끊임없이 재연했다. 다른 작곡가들이 사조나 장르, 유행에 좌우된 반면 베토벤의 음악은 그 모든 시대적, 사회적 경향을 초월하며 지금까지 영원한 생명을 누려왔다.

이런 영생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긴 세월 사람들을 열광시킨 베토벤의 위대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적어도 음악적 요소만을 따질 때 그의 작품에서 빈번하게 들려오는 예측불허의 리듬 변화와 불협화음, 그리고 유연성은 2세기나 지난 과거의 작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여전히 현대성을 과시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베토벤 이전의 고전음악은 완결무결하고 조화로운 음악을 이상으로 추구했다. 하지만 베토벤에 의해 음악은 시대의 변화를 좇고, 삶의 고민과 갈등을 함께 논하게 되었다. 천상을 떠돌던 신기루 같은 음악적 미학을 지상으로 착륙시킨 것은 베토벤의 가장 큰 업적이다. 심지어 이런 음악을 온전한 상태도 아닌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성취한 그의 재능을 사람들은 천재적이라 치켜세웠고, 그렇게 베토벤 신화는 탄생했다.

하지만 음악학자 로빈 월리스는 이런 베토벤의 신화를 다른 각도로 바라본다. 즉 시대를 초월한 베토벤의 음악은 그의 청각장애의 ‘극복의 산물’이 아니라, ‘그로 인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베토벤과 유사한 청각질병에 걸린 아내의 투병생활을 8년여간 옆에서 지켜본 그는 베토벤이 소리를 듣기 위해 시도한 무수한 노력의 흔적들을 그의 악보와 편지와 기록들에서 찾아냈다. 그 결과 청각장애에 대처한 베토벤의 모습은 별종도, 괴물도 아닌 자연스러운 인간의 적응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월리스는 말년의 베토벤은 결국 자신의 아내처럼 완벽하게 청각을 상실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처럼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조화롭지 않고 분열된 채 풀어헤쳐둔 음악을 악보를 통한 시각적 상상력으로 작곡할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만약 월리스의 가설이 사실이라면, 한 개인에게 찾아온 핸디캡 덕분에 온 인류는 영원한 문화유산을 얻게 된 셈이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핸디캡에 베토벤처럼 대처하지는 않는다. 지금 나에게 찾아온 고난이 성공의 열쇠라고는 베토벤 또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고난의 산물이라는 음악이 지금 우리 곁에서 들려오는 것만으로도 우리네 힘든 인생은 작은 희망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투병기와 청각장애자 베토벤의 음악적 투쟁을 번갈아가며 다루는 월리스의 에세이 ‘소리 잃은 음악(원제 Hearing Beethoven)’은 올해 국내 출판계에 엄청나게 쏟아질 베토벤 서적 가운데 첫 테이프를 끊으며 조만간 발간될 예정이다.

<음악 칼럼니스트·숙명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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