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세 번째 십 년의 시작에 습관적으로 걸었던 희망조차 무색할 정도로 불확실성의 안개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이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쿠드스군 사령관을 제거함으로써 중동에 전운이 고조되고 있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관련 동맹국과도 어떤 협의도 거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트럼프의 결정은 국제관계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초불확실성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국내 상황도 다르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새해 신년사에서 개혁과 공정을 토대로 ‘확실한 변화’와 ‘상생 도약’을 일궈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지만, 새해가 광화문과 서초동 집회로 시작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여전히 두 동강이로 분열돼 대립하고 있다.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말은 공허하다. 국가와 국민보다는 정권과 당파만을 생각하는 말들이 춤추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는 실종되고 광장만 요란하다. 대한민국의 정치가 위기다.

21세기 20년대가 시작하면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위기는 사실 민주주의의 위기다. 2016년 광화문 촛불시위가 열릴 때만 해도 많은 사람은 자유로운 정치 공간이 열리고, 민주주의가 성숙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조국 사태’로 상징되는 2019년은 국민이 통합되기는커녕 더욱 분열되고, 의회민주주의는 광장 정치로 대체되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얘기하는 역설적 상황을 연출했다. 국민통합과 새로운 민주정치의 대전환을 이룰 수 있었던 촛불의 정치적 자원은 오용되고 낭비되었다. 훗날 역사는 이 점을 이 정부의 최대 과오로 기록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가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현상을 목격했다. 민주주의가 문화적으로 우리의 삶에 스며들기보다는 단지 투표 행위로 쪼그라들어 형해화됐기 때문이다. 숫자가 지배하는 곳에서 정치는 타락한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차이를 충분히 토론하고, 합의를 추구하는 곳에서만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원칙이 된다. 다수가 숫자의 힘을 믿고 소수를 억압하거나 배척할 때 다수결은 독재의 민주적 수단이 된다. 여론을 조작하고 국민을 선동할 수 있는 디지털 매체가 발전할수록 숫자의 힘을 믿으려는 파시즘적 경향은 증대한다. 파시즘이라는 말은 지독히 싫어하면서도 실제로는 파시즘적으로 움직이는 군중의 역설적 현상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 ‘더 많은 민주주의’가 대안이다. 민주주의의 최대 위기는 스스로 민주적이라고 자평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민주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발생한다. 이런 경향은 한때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행하는 일은 모두 민주적이라고 믿는 운동권 세대에서 많이 발견된다. 실제로는 비민주적이면서 스스로를 민주적이라고 믿는 이러한 도착(倒錯) 현상은 자신만 옳고 남은 틀렸다는 수많은 ‘정치적 꼰대’를 양산한다.

민주화 세대의 이면이 드러날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정치에 대한 젊은 세대의 냉소적 무관심이다. 패스트트랙으로 통과된 선거법개정안으로 투표권이 만 18세까지 확대돼 젊은 표심을 잡기 위한 경쟁이 벌써 대단하다. 밀레니얼 세대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실제로 우리의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 밀레니얼 세대가 민주적 가치를 대립적인 반정부 투쟁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 학습했다는 점은 희망적이다. 산업화 세대나 민주화 세대 모두 권위주의에 매몰된 꼰대라면 꼰대짓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핵심적 가치는 ‘반권위주의’다. 성장기부터 적나라한 경쟁에 내던져진 밀레니얼 세대가 유독 ‘공정’과 개인의 ‘자유’에 민감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사실 우리 삶 속에서 문화적으로 실천될 수 있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그들은 모든 일이 공정하게 이뤄지길 바라고, 개인으로서 인정받기를 바란다. 이들은 운동권 세대의 1차원적 민주주의와는 달리 다양한 문화적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반권위주의적 민주주의의 핵심가치는 다원성이다. 아렌트가 정치의 본질적 전제조건이라고 설파한 ‘다원성(plurality)’은 사실 민주주의의 시금석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2016년 촛불집회 참여자 분포가 20대에서 60대 이상에 이르기까지 연령대가 다양하였으나 2019년 광화문과 서초동 집회에서는 현저하게 획일화되었다고 한다. 다양성이 줄어들고, 정치지형이 더욱 획일화된 것이다. 누가 도대체 다양한 목소리를 억압하고, 사회를 한 방향으로 획일화하는가. 자신이 활동하는 영역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하고 저항하는 것이 바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길이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가 좀 더 다양해지고, 다른 의견을 관용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숫자 싸움과 정치적 패권 투쟁에 놀아나지 않는 밀레니얼 세대의 명랑한 반란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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