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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옥의 컬처 아이] 펭수가 남극에서 온 진짜 이유

펭수가 전파하는 가치들… ①수평 문화 ②신개념 직업 ③젠더 프리 ④생태주의


펭수는 어쩌면 한국이 가야 할 미래 사회를 보여주려고 남극에서 왔는지 몰라. 뽀로로 성공 신화의 나라에서 BTS 같은 글로벌 스타가 되고 싶어 왔다는 말은 그냥 하는 소리인지도 몰라. EBS 연습생 오디션 때 봤듯이 몸에 덕지덕지 묻은 미역 줄기, 머리의 조개껍데기는 펭수가 얼마나 소명감을 갖고 거센 파도를 헤엄쳐 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인 게지. 펭수가 지난 연말 송가인, BTS를 누르고 방송연예분야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고, MBC연예대상 신인상 후보에 오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지 뭐야.

난, 사실 꼰대세대에 속해. 펭수를 알게 된 건 한참이나 지나서였어. 지난해 꽃피는 봄에 EBS ‘자이언트 펭TV’와 유튜브 채널에서 데뷔했다는데, 초겨울 찬바람이 불 때에야 그를 알았거든. 청춘들은 다 떠나고 ‘노땅들’만 남아서 노닥거린다는 페이스북에서 누군가 ‘요즘은 펭수가 대세여’라고 쓴 글을 보고 대세에 뒤질까 싶어 부랴부랴 유튜브로 달려갔지. 랩, 춤 같은 기본 실력에 끼와 순발력. 한마디로 예능감이 쩔더구만. 참치통조림 회사 광고모델이 되고, 남의 방송사 시상식에 불려 나가는 펭수의 절정 인기가 이해가 갔어.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보면 볼수록 펭수가 남극에서 이 땅에 온 거대한 뜻은 따로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뭐야. 펭수의 존재 자체가 전파하는 새로운 가치 때문이야. 그의 종횡무진 행보는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어떤 메시지를 던져.

눈치챘겠지만 우선 수평적인 문화야. 오디션 때 심사위원들이 합격 여부는 나중에 발표한다고 하자 “지금 해줘요. 그래야 떨어지면 MBC든, KBS든 가게요”라고 받아치던 거 다들 기억하지? 한마디로 을의 반란이야. 이 땅의 모든 을에 쾌감을 줬던 그 사이다 멘트. 근데 그건 수직적인 사회에 수평 문화를 재촉하는 구호 같은 것일지도 몰라. 디지털 문화가 가속화되니 기성의 권위와 서열이 무너지는 쪽으로 가고 있는 건 다 알잖아. 기업도 생존하기 위해선 복잡한 의사 결정 단계를 줄여 신속하게 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을 갖춰야 해. 수평적 조직 문화는 미래 사회의 필수지. 펭귄이 아닌 ‘사람 직원’이 사장한테 ‘밥 한 끼 합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조직은 얼마나 멋질까.

음, 두 번째는 새로운 직업인 상(像)을 펭수가 보여주고 있단 생각이 들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직장 대신에 직업인 개념이 등장한다잖아. 펭수가 MBC라디오 ‘여성시대-양희은 서경석입니다’에 출연한 걸 듣곤 깜짝 놀랐지 뭐야. 펭수는 EBS 소속인데도 KBS, MBC, SBS 등 다른 방송사의 인기프로그램 어디든 진출하지. 경계가 분명한 전통적인 직장 개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세 번째는 가부장적 사회가 부여한 젠더 정체성을 거부하고 ‘젠더 프리’의 삶을 일상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야. 여성들이 여성스러움이라는 사회가 강요한 시선에 맞서 탈코르셋 운동을 펼친 지는 좀 됐어. 영국에서도 더운데도 반바지를 못 입게 하는 학교 당국에 항의해 남학생들이 치마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지. 목소리는 남자 같은데, 시상식에 하늘하늘 흰 원피스를 입고 등장하는 모습은 얼마나 신선하니.

마지막으로 생태주의 감수성이야. 펭수가 이육대(EBS 아이돌 육상대회)에서 인간팀 대 비인간팀 경기를 하던 중 ‘규칙이 비인간에게 불리하다’고 항의한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지. 근대 사회가 인간중심주의로 흘러 지구 환경이 크게 파괴되자 이에 대한 반성이 일고 있어. 인간은 이제 다른 생물과 공생하는 시대를 살아야 한다는 걸 펭수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웅변하고 있는 셈이야.

한데 이걸 어쩌나. 이 모든 것들에 특히 환호하는 이들은 밀레니얼 세대라는 거지. 기성세대는 뒤처져. 성별이 없는데도 기성의 제도는 따라가지 못해서 MBC방송사가 펭수를 ‘남자’ 신인상 후보에 올려 창피를 당한 게 그런 예지. 근데 나도 기성세대에 속하니 분발해야겠어. 또 하나 걱정이 되는 건 이 모든 일이 펭수라는 캐릭터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야. 펭귄이 아닌 사람이 펭수와 같은 행위를 했을 때 벌어질 사회적 저항을 생각해봐. 펭수는 그런 저항감을 줄여 우리가 빨리 새 시대에 적응하게 하려는 원대한 뜻을 품고 남극에서 헤엄쳐 온 게 정말 맞을 거야.

손영옥 미술·문화재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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