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우정 (2) 소아과 의사로 잘 나가던 어느 날…

캄보디아 의료선교 인원 부족하다며 도와달라는 친구 말에 함께 다녀온 후 자나깨나…

김우정 원장(앞줄 맨 왼쪽)이 2007년 1월 충무교회 단기팀과 대나무 평상 기차를 타고 캄보디아 뽀삿지방에서 오지마로 들어가고 있다. 헤브론병원 제공

재수할 때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아버지와 큰 형은 “역사는 무슨 역사냐. 의대가 괜찮아 보이는데 그거 해라. 가톨릭 의대도 괜찮다더라”고 하셨다. 이후 생각 없이 계획 없이 재미 없이 의예과를 다녔다. 관심은 인문학이었다. 반독재 데모도 많이 했다.

마냥 그렇게 살 수는 없어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다.1978년 2월 졸업과 함께 군의관으로 입대했다. 81년 4월 제대하고 서울성모병원에서 레지던트 수련의를 거쳐 85년에 소아과 전문의가 됐다. 교회 동기와 결혼도 했다.

소아과 의사로 잘사는 일만 남았다. 당시는 소아과 병원 깃발만 꽂으면 그냥 잘 될 때였다. 80년대 중반 신생아가 80만명이었고 전국에 의사는 2만여명, 소아과 전문의는 1300여명 정도밖에 안 됐다.

나는 한 소아과 전문병원에서 1년을 일하고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달동네에서 개업했다. 목표도 정했다. “정직한 의사가 되자.” 병원은 잘 됐다. 15년간 열심히 일했다. 동네 사람들은 인심이 좋았다. 과일도 채소도 갖다주곤 했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의료보험이 도입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각박해졌다.

2000년 경기도 용인 수지 신도시로 병원을 이전했다. 여기에서도 15년 일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목표도 다시 세웠다. “환자 눈높이에 맞춰 서비스 잘하는 의사가 되자.” 평범한 의사로서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평범한데 평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2004년 설 때였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캄보디아로 의료선교를 가려는데 의사가 부족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약품을 챙겨 합류했다. 의료 선교가 처음은 아니었다. 다른 나라도 몇 번 갔었다. 학생 때부터 오지, 보육원 등에서 봉사했다. 의료선교도 평범한 의사로서의 일상 같은 것이었다. 의료선교를 다녀오면 금세 잊었다. 주중에는 병원 일로, 주말에는 교회 일로 바빴다. ‘월화수목금금금’으로 20년을 살았다. 2주만 지나면 어디를 갔다 왔는지조차 기억 못했다. 보통은 그랬다.

그런데 그해 2월 다녀온 캄보디아 의료선교는 달랐다. 자꾸 캄보디아 생각이 났다. 캄보디아 아이들 눈망울이 떠올랐다. 의외의 질문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나. 캄보디아에 다시 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러다 2, 3개월 지나면 진정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환자든 친구든 누구든 전혀 묻지도 않는데 캄보디아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6개월을 살았다.

진료할 생각은 않고 허구한 날 ‘캄보디아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까 아내가 캄보디아를 같이 가보자고 했다. 7월쯤 일정을 잡았다. 의료선교는 2월에 갔다왔다.

6월 말이 됐다. 10여년 병석에 계시던 장인이 돌아가셨다. 장인은 예장통합 측 총회장을 역임하신 박종렬 목사님이셨다. 큰 딸인 아내는 무척 슬퍼했다. 이 상황에 무슨 캄보디아냐고 했다. 겨우 설득해서 캄보디아를 찾았지만 캄보디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 생각만 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 한 수상마을에 들어갔다. 엄청 더운 날이었다. 선교사의 안내로 수상마을 한복판에 있는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아내가 선교사에게 물었다.

“이런 배를 만들려면 얼마나 있어야 해요? 이런 배만 하나 있어도 선교에 큰 도움이 되겠죠? 한쪽에선 진료하고 한쪽에선 주일학교도 열고.”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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