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한국기독역사여행] “조선 관리들은 기생충… 믿는 백성은 게으르지 않았다”

여류 탐험가 이사벨라 비숍이 본 한국 선교 10년

영국성공회 목사의 딸로 선교사를 꿈꿨던 이사벨라 비숍은 신유 은사 과정에서 탐험가가 됐다. 이후 1894년 3월 서울에 도착해 한국 선교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이때 숭례문을 나와 남산 소나무길을 걸어 한강진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남·북한강을 탐험했다. 지난 11일 비숍이 사진을 찍었던 위치에서 찍은 숭례문 모습.
1894년 비숍이 찍은 숭례문 사진.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천국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이 나라를 좌파들에게 내어줄 수 없습니다. 빨갱이들을 때려잡아야 합니다. 이승만광장으로 모입시다.”

지난 11일 서울 숭례문(남대문) 앞. 미세먼지가 낀 날씨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숭례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숭례문 옆 세종대로로 트럭을 개조한 전도·집회 차량이 대형 스피커를 통해 참석의 목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동학 난’과 ‘청일전쟁’이 발발했던 1894년의 4월 14일 서울 숭례문. 영국 빅토리아시대 복장을 한 중년의 서양 여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성탐험가 겸 지리학자)이 숭례문을 통해 한국 순례 여행을 떠나며 기록을 남겼다.

1907년 일본 왕자의 한국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친일단체 일진회가 숭례문 앞에 세운 아치형 환영 문.

“서울을 둘러싼 모든 것이 옅은 녹색의 안개 사이로 비치고 자두나무와 복숭아나무의 꽃이 한창 피어나며 진달래가 산언덕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서울의 친절한 (선교사) 친구들과 헤어져 말 등에 올라 남대문을 거쳐 전쟁의 신 사원을 지나 남산의 소나무 우거진 능선 길을 돌아 나아갔다.”(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중)

비숍의 이런 여행 기록은 우리 국어 교과서에 실려 19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교재로 쓰인다. 비숍은 성공회 목사의 딸로 태어나 60대 초반에 ‘은자의 나라’ 한국 여행을 시작했다. 부산을 통해 제물포(인천)로 들어와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의 서울, 닥터 홀과 마펫 선교사의 평양, 게일 선교사 부부의 원산 선교지 등을 순례했다.

그러는 한편 북한강을 따라 춘천, 남한강을 따라 영월까지 누볐다. 한국인이 사는 만주와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도 순례지로 삼았다. 그는 한민족 이주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예수를 믿고 자립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서구우월주의의 편견을 버렸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1831∼1904)

한국 선교지 순례한 성공회 목사 딸

비숍의 한국 여행 기간인 1894~97년 한국은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에게 무참히 살해되는 등 사실상 일본 지배하에 놓였다. 그때 한국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겨자씨 같은 복음의 밀알이 떨어진 지 10여년이 됐다는 것이다.

사실 비숍은 ‘신사의 에스코트 없이 혼자 외출하는 게 흉한 짓’이란 걸 아는 여성이었으나 신병과 어머니, 여동생, 남편의 죽음 등으로 영적 체험을 한 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가가 됐다. 선교사가 되기 위한 인도 여행에서는 남편 이름을 딴 선교병원도 지었다.

그런 비숍을 한국교회사적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 중심의 복음 전파 10년’을 객관적으로 평가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미국 감리회와 장로회, 호주와 캐나다 장로회, 미국 침례회 등이 전근대 조선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고유의 문명과 충돌 또는 융합하는 과정을 제삼자의 객관적 시선으로 서술했다.

비숍이 한강 탐험을 위해 타고 다녔던 8.5m 길이 배가 포구에 도착했다. 그가 개척한 순례길 포구에는 훗날 예배당이 들어섰다.

그해 남대문을 나서 한강진에서 배를 탄 것으로 보이는 비숍은 50여일간 남·북한강의 강변 마을을 여행한다. 그는 먼저 광주 양평 여주 단양 제천 영월 등 남한강을 오르내렸다. 여행 중 조선의 정치·경제 및 풍물을 기록하는 한편, 목사의 딸답게 조선 선교 현황을 자세히 점검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한강 유역에는 예전 가톨릭 선교사가 두 곳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독교든 가톨릭이든 전도가 전혀 없다. 수호신(무속) 숭배가 전 지역에 걸쳐 지배적”이라고 했다.

당시 미국 북감리회 조선선교부가 영문잡지 ‘코리안리포지터리’ 등을 통해 본국을 향한 자의적 교세 현황을 보고한 것과 달리 비숍이 작성한 ‘1896년 한국의 선교단 현황’ 자료는 좀 더 객관적일 수 있다. 이 자료는 미국 북감리회와 북장로회, 호주와 캐나다 선교단, 프랑스 해외선교단협회 등 9개 선교단체와 그들에 의한 한국 전도 현황을 담았다. 가톨릭을 뺀 기독교 외국인 선교사가 71명, 조직교회 20곳, 세례자 1226명, 주일학교 학생 1295명, 남자 기숙학교 2곳, 여자 3곳, 신학생 0명, 내국인 목사 0명, 전도자 25명, 기독병원 8곳, 치료환자 5만9859명 등 30여 항목으로 수치화했다. 평양신학교가 1901년 설립된 것에 미뤄 비숍의 자료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덕수궁 옆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모습. 비숍은 입국 후 성공회 코르페 주교의 안내를 받아 서울 평양 원산 등지를 순례했다.

그는 한국 순례 및 오지 탐험에서 성공회 선교사 코르페와 젊은 미국인 선교사 밀러의 안내를 받는다. 서울 정동을 중심으로 한 성공회의 한옥식 예배당, 진료소 등 구호처소 그리고 감리회와 장로회의 예배당과 구호처소 등을 보며 “행동으로 기독교를 보여주는 의료선교, 매 시간 교사의 상냥하고 자애롭고 고상한 영향이 느껴지는 기독교 학교 등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든 (조선은) 발전이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서울의 도시 환경에 녹아들지 못하는 미국식 예배당을 “조악하게 모여 있는 형편없는 건축물”이라 비난하기도 한다. 평양 여행 기간에는 기독교의 타락을 염려하기도 했다.

그는 또 4차례 조선 여행 기간 중 일리아스 언더우드 부인의 소개로 고종과 왕비를 알현하고 국왕 부부가 풍전등화에 놓인 나라의 현실을 염려하는 모습을 적었다. 서구 문물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는 부부의 인상비평도 담았다. 그 왕비는 1895년 8월 살해됐다. ‘아름답고 총명한 왕비’의 죽음을 그는 깊이 슬퍼했다. 그때 비숍이 찍은 경복궁 경회루는 조선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스산하다.

‘게으른 한국인’ 시선 바뀌어

비숍은 중앙 및 지방관리들의 백성에 대한 학정을 목격하고 그들을 ‘기생충’이라 격하게 표현했다. 노예 상태의 한국 여성 현실에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비숍은 처음 한국 여행에서는 조선을 ‘야만’, 일본을 ‘문명’으로 인식했으나 거듭된 순례에서 “일본이 복음의 나무를 옮겨심지 않으면서 열매만 취하려 한다”며 일본의 근대는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반면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중에 조국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피해 그곳에 뿌리내린 2만여명의 조선인과 400여명의 조선인 그리스정교회 신앙인들이 합심해 공동체 농사로 부를 이루는 것을 보고 ‘게으른 한국인’과 ‘무속적 종교성’에 대한 자신의 시선이 잘못됐음을 깨닫는다.

경기도 양평 상심리 포구의 상심리교회를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모습.

몇 해 전 비숍이 여행했던 남한강 길 나루터에 세워진 양평 상심리교회, 북한강 양평 문호교회 등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비숍 일행은 8m 길이의 나룻배를 타고 이 복음의 길을 개척했다. ‘비숍 한강 순례길’에선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쪽배를 타고 오르내리며 나루터 처소를 세워나갔다. 비숍은 탐험가에 앞서 영성을 나누고자 하는 순례자였다.

비숍 한국 일지

·1894년 2월 부산·제물포
·1894년 남·북한강, 금강산~원산 블라디보스토크 순례
·1895년 1월 고종 부부 알현
10월 고종 알현
·1895년 11월 고양 개성 평양 안주 순례
·1896년 10월 고종과 왕세자 알현

양평·부산=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