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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아버지와 엄마, 고향교회

정진영 종교국장


어릴 적 고향교회는 나에게 보석 같은 시간 줘… 그 시절 얘기는 지금까지도 자양분

내 모교회는 고향 대구의 작은 교회다. 그곳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보냈다. 여전히 미약하지만 내 신앙이 싹튼 터전이자 유년과 청소년기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주일이면 아침부터 집에서 10분 거리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오전 9시 시작된 주일학교 어린이예배가 끝나면 집에 와서 하릴없이 뒹굴다 다시 교회로 향했다. 대예배를 마친 부모님과 함께 교회식당 등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도 집에 가지 않았다. 중고등부 예배 담당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귀가한다는 구실을 대며 늦게까지 친구들과 놀았다. 중고교생일 때도 주일의 일상은 비슷했다. 신앙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어울리는 재미가 좋아 주일이면 ‘교회 죽돌이’가 됐다.

고향교회는 1953년 경북의 같은 군(郡)에서 대구로 나온 인사들이 주축이 돼 설립했다. 동향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세운 곳이어서 직분과 무관하게 신도들끼리 무척 가까웠고 우리 또래의 자녀들도 꽤 친했다. 올해 창립 67년이 됐지만 부흥이나 성장과는 거리가 있는 아담한 동네교회다. 현재 출석교인은 200명 정도다. 아버지는 총각 때부터, 어머니는 결혼하면서 다니기 시작했다. 두 분은 새벽기도 걸음이 불편하다며 이사를 할 때 고르는 집의 첫째 조건이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을 만큼 철저하게 믿었다. 장로와 권사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이며 돌아가실 때까지 목사님과 교회를 극진히 섬겼다.

대학 때부터 서울에 와 취직과 결혼을 하면서 고향교회와는 점차 멀어졌다. 명절이나 휴가, 경조사 때 고향에 내려오는 경우 주일과 겹치면 어쩌다 예배에 참석했다. 부모님은 나를 앞세워 교회 가는 걸 무척 좋아했다. 대문을 나서는 두 분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얼굴은 밝았다. 1930년대 생 연배의 많은 부모가 그렇듯 장남과 동행한다는 걸 기뻐했고, 특히 기독교 정신이 담긴 국민일보 기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예배 후 내가 꺼리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목사님이나 장로님, 권사님들에게 데리고 가서 일일이 인사를 시켰다. 예배 시작 전에는 적지 않은 액수의 감사헌금을 기명으로 할 것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믿음이 약한 아들에게는 교회에 기여한 당신의 헌신을, 교인들에게는 교회의 기도로 자란 자식을 확인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부모님은 어쭙잖은 내 칼럼의 열혈독자였다. 글이 신문에 실리면 대개 그날 오전 중 전화를 걸어 바로 반응을 보였다. ‘잘 썼다. 참 좋다’가 대부분이었다. 내용과 무관하게 무한한 격려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50대 중반의 자식도 부모에게는 여전히 아픈 손가락이었음을 그때는 잘 몰랐다.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 아버지의 공책 속에 삐뚤삐뚤 오려놓은 두툼한 종이뭉치를 발견했다. 내 글이 담긴 신문을 잘라서 모아놓은 것이었다. 공책에 풀로 붙여놓은 것이 있고 볼펜으로 줄을 쳐놓기도 했다.

고향교회는 내게 보석 같은 시간을 선물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성탄 선물을 여러 번 받으려고 계속 줄을 서다 들켜 두 손을 들고 벌을 섰다. 중1 때는 예쁜 여학생을 혼자 좋아하며 끙끙댔고, 고교 2학년 성탄전야에는 남녀 학생들이 모여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추위에 벌벌 떨며 새벽송을 불렀다. 그때의 고향교회 스토리는 지금의 나를 키운 자양분이었다

재작년 같은 해에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고향을 찾을 기회가 거의 없어졌다. 동기(同氣) 피붙이가 고향에 없으니 대구 갈 일은 더더욱 없다. 부모·형제가 부재한 고향이 고향 같지 않듯이 고향교회도 확연히 낯설어지고 있다. 친했던 그때의 친구들은 작년 말 우연히 연락돼 몇십년 만에 카카오톡으로 근황을 확인했다. 모두 같이 만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며칠 전 우연히 고향교회 홈페이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처음으로 접속했다. ‘사진 자료실’ 항목을 여러 번 클릭했다. 그곳에는 아버지와 엄마가 처음 보는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교회가 어르신들을 모시는 경로효친 야외행사에서 낯익은 장로님 권사님 사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며칠 후면 설이다. 막히면 20시간이 걸리기도 했던 명절 귀향길을 걱정하면서도 엄마 아버지 뵐 생각에 가슴 설렜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부모님은 떠났고 고향교회는 멀어졌다. .

정진영 종교국장 jy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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