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우(35·삼성화재), 한선수(35·대한항공), 신영석(34·현대캐피탈)은 문성민(34·현대캐피탈), 김요한(35·은퇴) 등과 함께 ‘황금세대’로 불리며 남자배구의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24년 올림픽 실패’란 쓰디쓴 역사도 감내해야 했다.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신영석)” “스트레스에 한 숨도 못잤다(박철우)”는 말처럼 이들은 2020 도쿄올림픽 아시아 예선에 온 힘을 다 쏟았다. 올림픽의 짐을 후배들에 떠넘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자세가 보이자 실패한 도전은 팬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세 고참 선수는 지난 12일 그동안 대표팀에서 느꼈던 고충을 토로했다. “성적을 못 낸 선수들이 가장 큰 문제(박철우)”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남자배구의 미래가 바뀔 수 없기 때문(한선수)”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꿈꾸던 대표팀은 그곳에 없었다

한선수는 “우리가 생각했던 대표팀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만큼 지원은 열악했다. 과거 선수단은 대회에서 입을 유니폼도 출국 직전에야 지급받았다. 배번이 틀려 공항에서 받는 일도 있었다. 부상 방지를 위한 테이핑 물품도 제때 받을 수 없었다. 문성민이 인터뷰에서 “테이핑 정도는 빨리 줬으면 한다”고 말하고서야 개선됐다고 한다.

국제대회엔 감독, 코치에 한의사 1명 정도만 선수단과 동행했다. V-리그 구단의 협조로 코치·트레이너 등이 파견될 수 있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2013년 국제배구연맹(FIVB) 월드리그 일본전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된 문성민처럼 선수들은 대표팀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얻었다. 한선수는 “지난해 무릎 부상 재활 중 대표팀에 합류했다. 구단 트레이너를 데려간다고 했지만 선수촌 방을 못 준다고 해 사비로 방을 얻어야 했다”고 밝혔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배구는 4강에 올랐다. 하지만 황당한 일이 생겼다. 8강까지 6경기 중 5경기를 치렀던 인천 송림체육관이 아닌 안산 상록수체육관에서 일본과 4강전을 치르게 된 것. 일본이 예선부터 쭉 경기를 치른 곳이다. 선수들은 “전까지 기세가 좋았는데 (4강에선) 홈 이점을 갖지도 못했다. 여자배구 중계권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어이가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송림체육관 좌석이 훨씬 많아 인기있는 여자배구를 배정했다는 것이다.

대표팀에 장기 계획이 없는 것은 가장 큰 문제였다. 감독과 선수들이 1년마다 바뀌는 상황 속에선 팀워크도, 문화도 바로 설 수 없었다. 박철우는 “감독님이 색깔을 낼 시간도 없고 장기적인 선수 육성도 없었다. 단지 성적만 요구하니 선수들도 답답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적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선수들이 졌다. 영광스러워야 할 대표팀은 그렇게 선수단에 ‘기피 대상’이 됐다고 한다.

이번 대회도 마찬가지였다. 전력분석관은 대회 3일 전에야 합류했고 공인구 문제도 해결되지 못해 리그에서 쓴 ‘스타’ 제품과는 다른 ‘미카사’의 공에 급박하게 적응해야 했다. 한선수는 “공이 제일 첫 번째인데 영향이 컸다”고 했다.

한국 남자배구 대표팀 고참 선수들이 지난 12일 중국 장먼의 선수단 숙소인 완다 렐름 호텔 근처 카페에서 인터뷰 후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한선수, 신영석, 박철우.

“‘충분한 지원이 있었는데 못했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죠. 그동안 우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배구를 할까란 생각만 들었어요(박철우).”

미래 대비가 너무 늦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높이에서 열세였다. 박철우와 신영석이 버텨줬지만, 미래엔 허수봉(22·상무), 임동혁(21·대한항공) 외에 눈에 띠는 라이트 대체자가 없다. 각 구단 주전들이 대부분 30줄인 센터도 마찬가지다. 신영석은 “세대교체가 이미 너무 늦었다”라고 말했다.

라이트 기피 현상은 심각하다. 현 용병제도 하에선 주로 라이트에 외인들이 영입된다. 용병과 포지션 싸움을 해야 하는 젊은 선수들의 입지가 좁아져 대표팀 전력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박철우는 “용병제도가 없던 저희 세대와는 달리 지금은 라이트를 가장 기피한다”며 “키 큰 선수들은 타 종목으로 옮기기도 하는데, 유소년이 자라나지 않으면 돌파구가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용병 아시아쿼터제를 새로 도입하거나, 용병에 세트·라운드 출전 제한을 걸어 젊은 선수들이 뛸 기회를 늘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박철우는 “비싼 용병을 데려와도 아프다고 나간다. 베트남이나 필리핀에서 3000만원 받고 뛰는 인도·카타르 선수들이 오히려 효율적”이라며 “이 경우 외인의 라이트 쏠림 현상이 누그러질 것”이라고 밝혔다. 신영석도 “어떤 게 남자배구를 위한 길인지, 리그와 대표팀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밝혔다.

태극마크의 자긍심 느낄 수 있도록

지원도 없이 ‘국위선양’만 요구하기보단,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다는 데 자긍심을 느낄 만한 실질적인 혜택도 필요하다. 박철우는 “대표팀에 뽑힌 선수들의 가치는 높게 평가해줘야 한다”고 했다. 한선수도 “일본은 12억원이나 하는 블로킹 기계를 도입했다”며 “체계적인 지원은 없더라도 최소한 여자배구처럼 국내에서 아시아선수권 대회라도 개최해줬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영석은 지난해 임도헌 감독이 2022년까지 지휘봉을 잡게 된 후 주장을 맡았다. 그는 주장으로서 ‘모래알’ 같았던 팀 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신영석은 “선수들이 ‘대표팀은 다르다’고 느낄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시간 약속, 인사는 기본이고 코트 안 규칙들을 만들기 위해 선수들을 따로 불러 쓴소리도 했다”고 밝혔다. 한국이 이번 대회에서 쉽게 지지 않는 끈질긴 집념을 보여준 비결이다.

“이 정도까지 대표팀을 개선하는 데도 15년이 걸렸어요. 모든 것들이 금방 다 바뀌진 않겠지만 조금이나마 시간을 단축해 후배들이 대표팀에 자부심을 느끼고 더 좋은 환경에서 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박철우).”

장먼=글·사진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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