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아픔 어루만지며 가슴 속에 희망, 꿈의 꽃씨 뿌려

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3>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가 1989년 서울 가락동 지하 예배당에서 열린 교회 창립 1주년 기념예배에서 기도하고 있다.

1988년 서울 송파구 가락동 지하상가 76㎡(23평)에서 교회 개척을 준비할 때 일이다. 서울에 이삿짐을 풀어놓자마자 집사람이 주변 교회를 돌아다니더니 주보 몇 장을 가져왔다. 주보를 보니 주변 목사님들의 이력이 너무나 화려하고 스펙이 좋았다. 바로 옆 건물에서 개척한 목사님은 연세대를 나왔고 조금 더 옆에 있는 목사님은 고려대를 나왔다. 조금 더 가서 건너편에 있는 목사님은 서울대를 나왔다. 바로 앞에 있는 목사님은 감리교신학대, 그 옆으로 조금 더 가서 있는 목사님은 총신대, 저 위쪽으로는 고신대 출신의 목사가 있었다.

지방신학교 출신이었던 나는 주보에 이력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목회자들의 화려한 스펙의 숲에서 한 그루 못생긴 나무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그때는 목사도 아니고 전도사 신분으로 교회 개척을 했다. 부목사로 써주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쯤 되니 집사람이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전도사님, 어쩌다가 이런 곳을 개척 장소로 삼았어요. 저런 분들과 경쟁해서 어떻게 성공하려고 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 다시 지방으로 내려갑시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딱 맞는 말이었다. 그럴수록 이를 더 악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이래 봬도 하나님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저와 동행하는 스토리가 있지 않습니까. 제발 사람을 보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했을 때 성령님께서 이렇게 질문하는 듯했다. “내가 너에게 한 영혼, 영혼을 보내주면 너의 생명처럼 사랑해 줄 수 있겠느냐.” 그때 나도 모르게 성령님께 이렇게 답을 드렸다. “성령님, 물론이지요. 저의 생명을 다해 그들을 사랑하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지하상가 개척교회를 찾아오는 분들은 대부분 마음에 쓴 뿌리가 있고 독버섯이 있었다. 아니, 아예 마음속에 나쁜 운전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 실패를 통해 상처를 받았거나 기존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담임목사에 대한 독점성이 강하고 주목받기를 좋아했다. 경험으로 봤을 때, 그들을 효과적으로 양육하면 큰 일꾼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상처받은 사람끼리 또다시 싸우다가 교회 공동체가 깨질 것 같았다. 그래서 개척교회에선 30명, 50명이 모이다가 서로 싸우고 다퉈 원점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개척교회 목회는 성도들의 가슴과 뇌리에 깊이 뿌리박힌 상처와 아픔의 쓴 뿌리, 독버섯을 먼저 뽑아줘야 한다.

그래서 먼저 그들의 아픔에 동참했다. 그들의 심리적 아픔을 어루만져 줬다. 성장과정에 상처가 있는 사람에겐 내면의 지하실에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다. 그 어린아이와 화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할 때 타인에 대한 공격성으로 나타난다. 먼저 성도들의 마음속 지하실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십자가의 복음으로 달래줬다.

특히 대형교회나 타 교회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을 뽑아내 주었다. 교인들이 대형교회나 타 교회를 욕할 때 목회자가 같이 욕하면 안 된다.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되, 위로와 희망을 줘야 한다. “얼마나 아프셨나요. 힘드셨나요.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제가 더 잘 섬기겠습니다.” 주보 1면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그림을 넣어 인쇄했다. 그리고 맨 밑에 ‘저도 이렇게 여러분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어루만지면서 가슴 속에 희망의 꽃씨, 꿈의 꽃씨를 뿌린 것이다. “우리는 회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실패하고 상처받아 쓰라리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형제, 자매님을 우리 지하실 개척교회로 보낸 것이 아닙니까. 우리 다시 일어납시다. 저를 보십시오. 저도 한과 아픔과 상처가 많은 목회자입니다. 우리 같이 손을 잡고 일어납시다. 걸어갑시다.”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끌어안고 진심으로 기도하면서 사랑과 섬김, 비전의 꽃씨를 뿌린 것이다. 그러자 절망과 낙심으로 폐허가 됐던 교인들이 회복하며 한 명, 한 명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하며 꿈의 공동체를 이뤘다. 상처와 상처가 부딪치면 다툼과 분란밖에 안 일어나지만 꿈과 꿈이 연결되고 손을 잡으면 축복과 기적이 일어난다.

아무리 작은 개척교회라도 꿈과 꿈이 연결되고 융합되면 개인의 회복에 대한 희망이 솟아나고 교회 공동체의 부흥에 대한 열망이 타오른다. 그 회복과 부흥을 향한 열망을 기도회를 통해 엮어줬고, 진심 어린 사랑을 담은 설교를 통해 상처받은 심령의 영토에 꽃씨를 뿌렸다. 그러자 교인들의 영혼에 사랑의 꽃이 피고 꿈의 싹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회가 부흥했고 그때 사랑과 꿈의 꽃이 핀 사람들 대부분이 교회 중직자가 됐다. 교회가 부흥하면서 그들이 떠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기둥 같은 중직자가 돼 섬기고 있다. 그들은 교회 후세대들에게 믿음을 전수하며 사랑과 꿈의 꽃씨를 뿌리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하나님은 인간을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


선악과나무는 영어로 ‘트리 오브 나리지 오브 굿 앤드 에빌’(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다. 즉,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라는 말이다. 조금 더 의역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지식을 얻게 하는 나무’라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도 그것을 먹는 순간 당장 선악에 대해 눈을 뜨고 선과 악을 판단하고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런 의미에서 교부 어거스틴은 이 나무를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라고 했으며 이는 ‘자신의 의지에 대한 통제력’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아담과 하와에게 금지하셨을까. 선악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만 가진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의 간교한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의 그 고유 영역을 인간이 침범하고 도전한 것이다. 원래 하나님은 선악 판단의 주체를 하나님 자신이 되게 하셨고 선악 판단의 진정한 기준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두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오직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선악 판단의 주체도 하나님께 두고 선악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 말씀에 두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 선악의 지식을 추구하는 순간부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생각과 지식, 지혜, 자기 경험에 바탕을 둔 판단을 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선악과 열매를 따 먹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 열매를 따 먹도록 유혹했던 사탄의 시험과 유혹, 혹은 사탄의 정신과 사상을 선악의 원리로 삼아 사는 것을 말한다.

선악과적 삶의 중심에는 옛사람이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선악과를 따 먹게 했던 사탄은 지금도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의 욕구를 유혹하고 자극하고 발동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독자적 선악의 지식을 추구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의 본성을 그대로 소유한 옛사람을 폐기해야 한다. 그 모든 선악의 지식과 판단을 하나님 앞에 반납하고 생명나무를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지 20~30년 되고 중직자가 돼도 옛사람을 폐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선악과적 신앙생활을 하면 우리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라 자기의 선악 마인드와 판단에 기초를 두게 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추구할 수 없다. 신앙의 마인드나 패러다임 자체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공격적이다. 교회 안에서 항상 부정적이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아간다. 가정 직장 사업장에서도 늘 하는 것이 시기와 질투, 원망과 불평이다.

그뿐인가. 그 선악 판단의 대상은 하나님에게까지도 옮겨간다. 자신의 지식과 생각으로 결정하고 판단해놓고 나중에 손해가 나고 불이익을 당하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며 선악 판단의 바벨탑을 쌓는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유는 하나님 생각보다 내 생각이 더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선악의 지식을 먼저 추구하고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 회의의 경우도 그렇다. 원래 교회 회의는 일반 세상 회의와 다르다. 왜냐면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회의도 항상 자기의 선악 판단에 따라 결정하는 것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결정하며 그 뜻을 순종하는 방향으로 회의가 진행돼야 한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생각과 내 주장과 내 뜻을 관철하는 회의를 해서는 결코 안 된다. 내 생각이 아무리 옳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다면 철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선악의 지식을 추구하고 자기 스스로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기 시작하면 교회 회의에서도 내 뜻과 주장만을 관철하려 한다. 그래서 내 뜻과 내 고집을 관철하기 위해서 “법이요, 규칙이요”라고 외친다. 물론 공동체의 질서 유지와 교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법과 규칙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 욕망을 이루고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과 규칙을 하나님의 뜻과 은혜보다 앞세워서는 안 된다. 바로 이런 선악과적 신앙과 삶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허물고 있지 않은가.

소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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