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저 사람은 무슨 기도를 하고 있을까. ‘삶의 한가운데 영원의 길을 찾아서’의 첫 페이지에는 저자의 기도문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시간에 시간을 더해도 영원이 될 수 없으며 인간적 절망을 인간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면 신과의 사랑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아래 사진은 책을 펴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픽사베이, 열림원 제공

“선생님 삶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 사실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아마도 ‘신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일 겁니다. 인생관 가치관 소유관을 뒤집어 놓았을 뿐 아니라 생활을 이끌어 가고 있는 바탕에도 ‘신의 계심’이라는 뜻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신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은 적이 있나요.”

“신앙인들이 신의 존재나 본질을 논한다는 것은 마치 자식들이 방에 들어앉아 아버지의 존재와 본질을 논하는 것처럼 쑥스러운 일입니다. 아버지는 바로 옆방에 계시는데….”

“어떤 사람들이 신을 믿는 겁니까.”

“종교에 관심이 있어야 하고, 신을 체험한 적이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해보지 못한 철학자는 아무리 긴 세월과 노력을 바쳤다 해도 종교에 관한 한 고아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며, 또 그 속에 사는 어린아이는 부모의 존재와 본질을 회상해 봄으로써 아버지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종교와 신앙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100세 철학자’가 전하는 종교·신앙

위의 대화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최근 발표한 ‘삶의 한가운데 영원의 길을 찾아서’에 등장한 내용 중 일부를 일문일답 형태로 가공한 것이다. 1920년생인 김 교수는 올해 상수(上壽)라는 수식어가 붙는 100세를 맞았다. 대한민국 철학계의 거목인 그는 수필가로도 명성이 대단한데, 이유는 그의 글에서 묻어나는 그윽한 기품 때문이다. 그동안 그가 발표한 글들은 젠체하지 않으면서도 통렬했고, 동시에 따뜻하기까지 했다. 담백하면서도 아름다운 글이 적지 않았다.

‘삶의 한가운데…’는 독실한 크리스천인 김 교수가 처음으로 내놓은 신앙 에세이다. 종교란 무엇이며 신앙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신앙인의 자세는 어때야 하며, 교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다정한 어조로 들려준다. 묵직한 주제를 다뤘으니 어려울 거라고 속단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다른 종교까지 아우르는 내용이어서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흥미롭게 읽을 만한 신간이다.

이스라엘 학자 유발 하라리는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갈수록 사그라지는 종교의 현실을 도마에 올렸었다. 그는 종교가 언젠가부터 “창조하는 힘”을 잃고 “반응하는 힘”만 과시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분석처럼 과학이 모든 논의의 주도권을 쥐는 상황이니 종교는 언젠가 유물로 전락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종교가 다시 과거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까. 김 교수가 제시하는 처방전은 간단하다. “개방적이며 동적(動的)인 생명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리나 신조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 지향적이며 창조적인 가치관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생명력을 지니고 역사의 동적인 활력을 갖춘 가치관을 줄 수 있는 종교가 되었을 때 종교적 신앙과 가치관은 과학과 철학의 시대에 있어서도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종교와 미신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답은 그것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에 달렸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가령 그는 수십 년 전 어린 아들과 부석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사찰 이름에 들어간 부석(浮石)은 말 그대로 ‘떠 있는 돌’을 의미하는데, 당시 안내를 맡은 이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돌이 크지만 사실은 공중에 떠 있는 것입니다. 가는 실오라기로 잘 넘겨 가면 실이 끊어지지 않고 저쪽으로 빠져나옵니다.” 설명이 끝나고 아들은 저 말이 진짜인지 궁금해했고, 김 교수는 단호한 어조로 거짓말이라고 일러주었다. “유감스럽게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종교적 욕구와 신앙적 의의를 강조한 나머지 비과학적이고 반이성적인 사실을 승인하며 믿기를 좋아한다. …종교 생활에서 진실이 아닌 것은 배제되어야 한다.”

김 교수가 보낸 100년은 보통 사람들로선 상상하기 힘든 긴 세월이다. 그의 삶에는 사금처럼 빛나는 추억의 순간도 많았다. 김 교수는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났으면서, 저마다 한국 철학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긴 안병욱 교수, 김태길 교수와의 추억담을 들려주는데 이런 내용이다.

김 교수는 언젠가 김태길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셋이 50년 동안 함께 일했으니 1년에 두세 차례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자”고 제안했다. 안 교수의 뜻도 자신과 같다고 전했다. 한데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그러기엔 때가 늦은 것 같아. 이제 새삼스럽게 정을 쌓았다가 누군가 한 사람이 먼저 갈 것 아니겠어? 가는 사람이야 모르지, 보내고 남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겠어?”

김태길 교수는 2009년에, 안 교수는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 “철학 삼총사” 세 사람 가운데 저자만 덩그러니 남은 셈이다. 그는 “어머니와 아내를 보냈을 때는 집이 빈 것 같았는데, 두 친구를 보내고 나니까 세상이 빈자리로 변하고 혼자 남은 것 같은 공허감이 찾아들었다”고 적어두었다.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한국교회를 향한 따끔한 조언도 곳곳에 등장한다. 김 교수는 한국에 “지나치게 큰 교회”와 “지나치게 작은 교회”가 너무 많다고 적었다. 김 교수 스스로 “소망스러운” 규모라고 여기는 교회의 성도 숫자는 500~700명 정도. 목회자들이 목회하기에도, 성도들이 “정돈된 교회 생활”을 하기에도 저 정도가 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는 ‘근로자들의 교회’ ‘지성인이 많이 모이는 교회’ 같은 식으로 교회마다 개성을 띠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첨언한다. 교회가 정치에 너무 깊숙이 발을 들이면 교회로서의 구실을 다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거나, 연합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교회주의를 경계하라는 메시지는 이 책의 행간 곳곳에 녹아 있다. 김 교수가 생각하는 교회주의는 거창한 게 아니다. “신앙생활을 교회에만 국한하는 일”이다. 그는 올바른 신앙생활의 예시로 지인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주일이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매주 한 시간은 성경을 연구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학문과 사회봉사에 쏟는다. 김 교수는 “한국의 교회들은 지나치게 교회주의에 빠져 있으며, 각각의 교회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권위는 있어도 권위주의에 빠지면 안 되듯이,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있어야 하나 그것이 교회주의에 빠지면 본래의 길에서 어긋나기 쉽다”고 강조한다.

신앙을 가진 독자라면 ‘삶의 한가운데…’를 읽다가 곳곳에 밑줄을 긋게 될 것이다. 금과옥조와도 같은 조언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인데, 몇 개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돈을 가진다는 것은 칼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외과 의사만이 칼을 가지고 타인의 생명을 살려주듯이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돈으로 타인과 사회에 덕을 끼칠 수 있으나,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돈 때문에 자신을 망치고 사회에 해독을 끼치기 마련이다.”

“독서만큼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대인들은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만 가지고 산다. 정보는 필요하면 보고 잊어버리기 때문에 사람을 즉, 정신을 키워주지 못한다. 반면 독서는 인생의 진리를 키워준다. 그러니 독서를 통해 신앙의 진리를 성장시켜 갔으면 좋겠다.”

“‘왜 일을 하느냐’라고 물으면 이제는 그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봉사’이기 때문이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모든 일의 목적은 그렇다.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그 사람들이 좀 더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