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혼인관계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청구는 허용되지 않는 유책주의가 원칙
요즘 유책 배우자의 이혼청구 허용해야 한다는 파탄주의를
도입하자는 목소리 커지고 있으나 부작용 많을 듯


X와 Y는 1976년에 혼인신고를 마쳤고 슬하에 자녀 3명을 두고 있다. X는 2000년쯤 집을 나와 다른 여성과 동거하기 시작해 그 여성과 사이에 자녀 1명을 낳았다. 전업주부인 Y는 X가 집을 나간 후 X로부터 생활비를 지급받아 혼자 세 자녀를 양육해 왔다. X는 Y에게 이혼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2012년에 Y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Y는 이혼소송의 피고가 된 이후에도 X와의 혼인에 애착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혼인관계를 계속할 의사도 확고했다. 혼인관계 파탄의 책임이 있는 X의 이혼청구를 받아들일 것인가? 이 사례에서 대법관들의 의견은 나뉘었으나 다수의 대법관은 X의 이혼청구를 기각했다.

우리나라에서 이혼할 수 있는 길은 ‘협의상 이혼’과 ‘재판상 이혼’ 두 가지다. 협의상 이혼은 당사자가 협의를 통해 이혼하는 절차로서, 혼인관계 파탄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도 배우자와 협의만 되면 이 절차를 통해 이혼할 수 있다. 재판상 이혼은 협의상 이혼이 안 되어 법원의 판결로 강제로 이혼하는 절차다. 배우자 중 1명만이 이혼을 원할 경우, 이혼을 원하는 쪽이 상대방의 잘못을 들어 재판상 이혼을 청구했다면 그 청구는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앞서 본 사례처럼 불륜행위 등 잘못이 있는 배우자가 혼인관계 파탄에 관해 아무런 잘못이 없고 이혼도 원하지 않는 배우자를 상대로 재판상 이혼을 청구한 경우에도 이혼을 인용해 주어야 할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법이 정한 일정한 요건만 갖추어지면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도 허용해야 한다는 ‘파탄주의(破綻主義)’와 부정행위 등 혼인관계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청구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유책주의(有責主義)’가 대립한다. 우리나라는 ‘원칙적으로’ 유책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선진국가들은 1960년대 이혼율 급증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맞닥뜨렸고, 1970년대에는 재판상 이혼에 있어 유책주의를 버리고 파탄주의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파탄주의의 도입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사회를 향한 혁명적인 사건이라고까지 평가되는데, 그 이유는 파탄주의가 국가공동체를 제외한 ‘중간 단계의 공동체(communities intermediate)’ 중 가장 근본적이고도 마지막 보루였던 가족공동체의 해체를 가속화시킴으로써 공동체주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다.

파탄주의가 가족공동체에 끼친 영향력은 부부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전통적으로 혼인관계는 상호책임과 정조의무를 바탕으로 해 깰 수 없는 ‘언약관계’로 여겨졌다. 그런데 언약관계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부 쌍방이 혼인하기 전의 ‘독립된 자아’를 내세우기보다 혼인관계를 통해 형성된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아’를 정립시켜 나가야만 한다. 새 자아관을 지향하지 않으면 혼인관계는 공동체가 될 수 없다. 이 같이 부부 등 공동체 관계를 전제로 하는 자아를 ‘연고적(緣故的) 자아’ 또는 ‘지위적(地位的) 자아’라고 한다. 공동체주의가 지향하는 자아관이다. 하지만 시대 변화로 혼인관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깨트릴 수 있는 계약관계라는 인식이 팽배해져 갔고, 그 변화의 종국에 파탄주의가 있다. 파탄주의 도입은 혼인관계를 ‘부부간의 운명 공동체’라기보다는 ‘인간 대 인간의 잠정적 결합’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는 남녀가 혼인한 이후에도 자신의 독자적 자아를 혼인관계라는 공동체를 위해 변화시킬 필요가 없고, 혼인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정체성과는 별개의 ‘무연고적(無緣故的) 자아’를 계속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의 자아실현과 행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혼인관계를 해소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지향하는 자아관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파탄주의의 도입이 강하게 주장되고 있다. 하지만 파탄주의는 이상적인 제도가 아니다. 마이클 샌델은 ‘민주주의’(동녘)에서 미국에서 파탄주의가 도입된 이후 이혼이 피고용인의 해고보다도 쉬운 일이 되었고, 부부 쌍방이 언제든지 이혼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 혼인생활 동안 자녀와 가족을 돌보는 것에 헌신하기보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경제력을 확보하는 삭막한 동기를 부여하였으며, 이혼한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유책주의 시절보다 상대적으로 열악해졌다고 주장한다. 파탄주의 도입에 있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사정이다. 이외에도 파탄주의가 도입되면 저출산 문제가 더욱 심화될 수도 있다는 염려도 있다. 저출산을 초래한 원인은 다양하나, 여성들이 경력 단절과 자아실현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 것도 저출산의 한 원인이라고 한다. 만약 현시점에 파탄주의가 도입된다면 혼인한 이후 이혼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고, 이는 혼인과 출산을 꺼리는 경향을 심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유책주의에는 극복되어야 할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파탄주의의 도입도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천종호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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