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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마지막 이메일

박민지 온라인뉴스부 기자


5년 전 그를 처음 만났다. 마감 시한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인터뷰 지시가 떨어졌고 우여곡절 끝에 금융회계학부 교수인 그를 섭외했다. 당시 그는 너무 바빴다. 재능기부 식으로 전국을 돌며 강의를 한다고 했다. 별수 없이 서면 질문지를 보냈다. 사진도 부탁했더니 “찍어서라도 보내드릴게요”했다. 이 사진은 뜻밖의 곳에 쓰였지만.

그의 답변은 잘 모르는 내 눈에도 무척 훌륭했다. 서재에 앉아 찍었다는 사진도 상당히 쓸 만했다. 이메일 하단에 이력이 적혀있었다. ‘모 일간지 부장 역임’. 30여년간 신문을 만들어왔을 그는 초짜 기자가 원하는 걸 척척 꿰뚫었다.

기사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사실 그가 쓴 것이나 다름없었다). 1년 넘게 기사 캡처 화면을 자신의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해 놨다. 얼마 후 전화가 왔다. 밥을 사주고 싶단다. 썩 내키지 않았는데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시간 맞으면 봬요” 에둘러 고사하니 그가 말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쓰기만 하다가 제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았어요. 요즘 기자들 생활도 궁금하고요.” 아, 그도 기자였지. 왠지 모르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첫 만남은 생생하다. 마치 대학생처럼 백팩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가방은 묵직했는데 책이 들어 있다고 했다. 첫눈에 대단히 근사한 중년 남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향은 춘천이었고 내 또래 아들이 둘 있으며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고 은퇴설계를 공부 중이었다.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그가 내게 종이봉투를 건넸다. 동생과 자취한다는 말을 기억하고는 동생 몫의 음식을 포장해뒀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선후배 하자”며 방긋 웃었다.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내 기사를 거의 매일 보는 듯했다. 이건 좋았고, 이건 지루했으며, 이것도 취재해보면 어떻겠냐는 연락을 수시로 해왔다. 두루 관심이 많았던 그의 머릿속에는 신박한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내가 흥미를 보인 내용은 다음 만남의 대화 주제가 됐다. 책을 싸 들고 와 신나게 설명하던 그의 얼굴에는 ‘빨리 얘기해주고 싶어 죽을 뻔했다’고 쓰여 있었다. 특히 이 칼럼을 쓰기 시작했을 때 참 기뻐했다. 자신이 쓰고 싶었을 얘깃거리를 전해줄 생각에 들뜬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14개월 전이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을 거다. 그가 안내한 골목길 작은 레스토랑에 알록달록한 트리가 놓여 있었고 불빛이 아늑했던 기억이 난다. 헤어지며 그는 “오늘 말한 자료는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웬 이메일? 다음에 만날 때 주지’ 생각했다가 삼켰다. 분량은 상당했다. 강의 PPT와 읽었던 책을 요약한 내용이 전부 들어있었다. 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어놓는 그의 성격상 낯선 행동이었다.

그 후 연락이 뜸해졌다. 바빠서 그런가 보다 했다. 어느 날 프로필에 눈에 익은 사진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확대했다가 순간 머리를 맞은 듯 띵해졌다. 그건 영정이었다. 에이, 설마. 포털에 그의 이름을 쳤더니 부고가 떴다. 멍했다. 며칠 동안 몇 다리를 건너서야 그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됐다. 암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이메일은 삶을 정리하는 과정 중 하나였을 거다. 받아든 사람의 심정을 고려할 여유까진 없었을 그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을까.

그는 이제 없다.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그를 원망했다. 마지막 인사할 기회도 안 주다니. 주인에게 도착하지 못할 메시지를 썼다가 지웠다. 누군가 읽는다면 슬퍼할 것 같았다. 지금은 번호가 사라져 그마저도 보낼 수 없게 됐다. 혼잣말이라도 보내 볼걸. 후회에 후회를 쌓아가며 그를 보냈다. 내가 잘 아는 사진은 영정이 됐고 그는 자신의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에 맞은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그가 쉬고 있는 그곳은 왠지 포근할 것 같다. 어디에 있든 주변을 따뜻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으니까. 그가 떠난 자리를 곱씹는 나와 같은 후배가 많을 것 같다. 일을 사랑했고 사람을 아꼈으며 관계를 소중히 했고 시간을 아쉬워했으니까. 며칠 후면 그의 1주기다. 매년 이 무렵이면 그가 생각날 것 같다. 늦었지만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고마웠다고, 정말 좋은 어른이었다고 말해줘야겠다. 왠지 그가 이 글을 읽을 것만 같다.

박민지 온라인뉴스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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