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영화 ‘가스등(Gaslight)’은 값비싼 보석을 손에 넣으려는 살인범의 집요한 수법을 그렸다. 부유한 오페라 가수가 집에서 피살되자 조카딸 폴라가 그 저택을 물려받는다. 유학을 떠난 폴라는 잘생긴 음악가 그레고리와 결혼해 10년 만에 저택으로 돌아왔는데, 그와 살면서부터 사소한 물건을 자꾸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기억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고 느끼며 심리적 불안에 빠져들 무렵 밤마다 가스등이 흐릿해지고 다락방에선 소음이 들려온다. 남편은 매번 “가스등은 평소처럼 밝다”며 폴라의 망상으로 몰아갔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폴라도 그렇게 믿게 됐다. 경찰이 밝혀낸 진실은 남편이 밤마다 몰래 올라가 다락방 가스등을 켜서 분산된 연료만큼 아래층 가스등이 흐려진 거였다. 그레고리는 10년 전 그 살인범이었고, 폴라에게 접근해 다시 저택 들어가서 미처 훔치지 못한 보석을 밤마다 찾고 있었다.

이 작품은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심리학 용어를 낳았다. 세뇌를 통한 정서적 폭력을 뜻한다. 상황을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정신적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주입식 조종 또는 노예화라고도 부른다. 로빈 스턴은 저서 ‘가스등 이펙트’에서 이를 3단계 과정으로 설명했다. 가스등이 흐려진 것처럼 당연한 사실을 상대에게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미 가스라이팅에 휘말린 것이다. 상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2단계를 거쳐 3단계로 진행하면 폴라처럼 상대가 옳다고 믿게 된다. 이 책에는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부제가 붙었다. 그런 조종자는 피해자가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더불어민주당 영입인재 원종건씨와 사귀었던 여성이 그에게 성폭력과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옷차림을 지적하며 노출증이라 몰아세우고 “정신과에 가보라”는 말을 해대서 한여름에도 긴 옷만 입게 됐다고 했다. 더울 때 가볍게 입는 당연한 행동을 하려면 연인을 설득해야 했고 결국 상대방 논리를 수용하게 됐으니 주입식 조종을 당한 게 맞지 싶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가스라이팅이 개인 간의 문제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불공정보다 검찰 개혁이 중요하고, 증거인멸이 아닌 증거보전이고, 청와대 수사는 직권남용이며 기소는 쿠데타라는 논리…. 지난해부터 쏟아져 온 이런 말은 우리가 알던 당연한 사실을 하나씩 허문다. 자꾸 조종당하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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