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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사할린 징용 문제와 정부의 부작위

권기석 온라인뉴스부 차장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늘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결정 한 가지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한 달여 전인 지난달 27일 헌재는 일본강점기 사할린으로 징용된 한인과 그 가족이 낸 헌법소원 심판청구를 각하했다. 이날은 헌재가 ‘위안부 합의’의 위헌 여부를 심판해 달라는 헌법소원도 각하한 날이었다. 같은 날 국회는 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담은 공직선거법을 통과시켰다. ‘사할린 피해자의 헌법소원 각하’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뉴스였다.

사할린에서 살다가 영주 귀국한 한인 가운데 2296명은 2012년 11월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이들은 강제 동원 당시 받지 못한 임금의 청구권과 관련 한국 정부가 ‘부작위(不作爲)’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일을 할 의무가 있는 자가 그것을 하지 않아 다른 일을 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부작위다. 헌재는 정부가 부작위 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다. 2013년 6월부터 2016년 1월 사이 외교부가 몇 차례 당국 간 협의를 개최할 것을 일본에 요청한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으므로 부작위를 전제로 정부 행위가 위헌임을 주장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정부가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취지인데, 나는 정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일본에 몇 차례 “협의하자”고 요청한 것으로 면죄부를 받기에는 문재인정부를 포함한 역대 정부가 사할린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해 한 일이 많지 않다. 해당 헌법소원 청구의 핵심은 ‘분쟁이 있을 경우 제3국에 중재를 맡길 수 있다’는 한·일 청구권 협정 조항을 정부가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중재를 어디에도 요청한 적이 없다. 무료로 사건을 맡은 경수근 변호사에게 결정에 관한 평가를 물었더니 “결론을 미리 내놓고 한·일 관계 변화에 눈치를 보다 날을 잡은 것 같은 의심이 든다”는 답이 돌아왔다.

헌재 결정문 가운데 보충의견은 더 황당하다. 이종석 재판관은 “정부가 해결절차를 진행한 결과 오히려 청구인(사할린 출신 한인)과 국가에 불리한 결과가 발생하면 그때도 외교적 노력을 한 것으로 평가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또 “행정부에 외교적 노력을 다하라고 강제한들 선언적인 의미 이상이기 어렵다”고 했다. 헌재는 헌법소원 사유가 위헌인지 아닌지만을 판단하면 되는 것이지 왜 그에 따른 결과를 예단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또 헌재 결정은 그 자체가 선언적 수준을 넘어 상당한 무게를 지니는 것인데 왜 그 의미를 작게 보는지 모르겠다. 헌재 결정이 실망스러운 또 다른 이유는 결정이 너무 늦어서다. 이번 결정은 심판이 청구된 지 7년1개월 만에 나왔다. 영주 귀국한 사할린 한인은 모두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한 고령자다. 이때를 기준으로 귀국이 허용됐기 때문이다. 권경석 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회장에 따르면 100여명이 그 사이 세상을 떠났다. 법리적으로 복잡해 보이지 않는 결론을 내릴 것이었다면 진작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

한·일관계사를 전공한 이연식 박사는 한·러·일의 사할린 외교 협상을 다룬 책 ‘책임과 변명의 인질극(방일권·오일환 공저)’에서 10여년 전 일본 외무성을 방문했을 때 그곳 실무자들이 자료와 근거를 요구해와 당혹감과 굴욕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일본이 이미 자료를 방대하게 쌓아놓고 있으면서 굳이 한국의 학자에게 자료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러시아가 사할린 한인에 관한 기록을 공개한 1990년대 초중반 이후 10여년간 엄청난 연구 인력과 물량을 쏟아부어 자료를 조사하고 이관해 왔다고 한다.

만약 헌재 결정문에 적힌 정부의 ‘외교적 노력’에 일본이 응해 양국 외교 실무자가 협의 테이블에 앉았더라도 대화는 망신만 당하고 끝났을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2005년에서야 현지 실태조사를 시작할 정도로 너무 늦게 움직였다. 정부가 이 문제에 관해 진정으로 부작위 상태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피해자의 목소리를 뒷받침할 사료를 확보하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권기석 온라인뉴스부 차장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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