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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옥의 컬처 아이] ‘정치의 불시착’이 일어났으면

남북 로맨스 드라마는 정치 이벤트 덕에 가능했지만 남북관계는 좀체 풀리지 않아


사상 처음일 것 같은 남북 로맨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tvN)이 재미있다. 중독되듯 자꾸 보면서 드라마가 거둔 정치적 효과를 생각하게 된다. 스토리는 재벌 2세 윤세리(손예진 분)가 신제품 스포츠 의류를 테스트하기 위해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돌풍에 휘말리는 바람에 북한에 불시착하게 된다는 기발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마침 북한의 장교 리정혁(현빈 분)이 그녀를 발견하게 되고 경계 근무 소홀이 탄로 날까 숨겨주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드라마의 혁혁한 공로는 로맨스를 ‘미끼’로 북한 사람들의 일상을 재현한 데 있다. 군 사택 마을에 사는 주부들은 함께 모여 김장을 하고 생일을 살뜰히 챙겨준다. 남한에선 무너져 내린 공동체 문화에 대한 향수를 자아내는 풍경이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아이들 성적 자랑하고 부잣집에선 과외를 시키기도 한다. 누구는 손예진 때문에, 누구는 현빈 때문에 본다지만 나를 자꾸 TV 앞으로 부르는 건 조연배우들이다. 그들의 찰진 연기가 그려내는 북한의 일상이다.

그렇게 심리적 분계선을 넘어 북한의 보통 사람들이 우리의 내부에 들어왔다. 가랑비에 옷 젖듯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가 황석영씨가 감방 생활과 맞바꾸며 1989년 북한을 다녀온 뒤 쓴 북한여행기가 ‘사람이 살고 있었네’였다.

미술은 어떠했는가.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 은사자상을 받은 임흥순 작가는 2015년 영상작품 ‘북한산’에서 탈북자 김복주씨를 뒷모습으로만 보여주며 독백을 통해 북한 사람의 일상을 전했다. “아빠가 주방에 들어서면 엄마는 ‘무슨 남자가 주방에 들어서고 그래요! 꼴사납게!’, 그러면 아빠는 ‘종숙 동무, 외국에서는 요리사, 유명한 요리사는 모두 다 남자들이라우’했지요.” 닭살 금슬을 자랑했던 부모에 대한 회상은 역시나 북한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식의 메시지를 던진다.

박찬경 작가는 2017년 가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영상 작품 ‘소년병’을 선보였다. 헐렁한 어른 군복을 입고 하모니카를 불며 산을 쏘다니는 북한 소년병의 연약하고 순진한 모습은 피도 눈물도 없는 강군(强軍)으로서의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흐릿하게 만든다. 지금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표현 수위’가 낮지만 당시로선 종북적으로 비칠 수 있는 대범한 행위였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섰음에도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면서 미국과 북한 지도자 사이에 ‘꼬마 로켓맨’ ‘늙다리 미치광이’ 같은 독설이 오갔던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의 남북 로맨스는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앞서 있다. 미술이 가보지 못한 영역을 대중문화가 활보하고 있는 셈이다. 드라마에 금기된 상상력의 빗장을 풀어준 것은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이다. 급작스러운 해빙 무드와 함께 그해 4·27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나란히 손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슬쩍 넘어갔다 오고, 9월의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선 정상 부부가 백두산 천지에서 인증샷을 찍는 등의 정치 이벤트가 없었다면 이런 남북 로맨스 서사는 불가능하다.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느끼는 곳이 대중문화다. 대중문화를 떠받치는 건 자본이다. 정치 지형도가 달라짐으로써 돈 되는 콘텐츠가 개발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에선 이제 북한 군인들이 남한으로 내려와 청담동을 활보한다. 갑자기 나타난 그들을 보고 손예진이 ‘간첩신고를 해야 하는 것 아냐’라며 냉전시대식의 생각을 하는 장면 따위는 안 나온다.

드라마는 정치의 덕을 봤지만, 그 정치는 좀체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남북 관계는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이후 어떤 진전도 없다. 남한은 신년 초부터 북한으로부터 면박만 당했다. 미국을 방문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면담에서 나온 트럼프의 김정은 생일 축하메시지를 북한에 전했다가 “중뿔나게 끼어드는 것은 좀 주제넘은 일”이라는 핀잔만 들었다. 북한은 북·미 사이의 중재자, 촉진자가 아닌 ‘당사자’ 역할을 해 달라며 남한에 최후통첩을 한 적이 있다. 문재인정부는 북·미관계가 잘돼야 남북 관계가 풀린다는 주술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 청와대가 금강산 관광이나 대북 개별 방문을 검토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정치의 불시착’이 필요한 시점 아닌가.

손영옥 미술·문화재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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