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 사브르 ‘세계랭킹 1위’ 오상욱이 지난달 22일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흰색 도복을 입고 ‘찌르기’ 동작을 하고 있다. 진천=권현구 기자

한국 펜싱 사브르 간판 오상욱(24·성남시청)이 2018년 유럽 대회에 참가했을 때다. 시합을 마친 대표팀은 귀국을 위해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힘든 일정에 지친 막내 오상욱은 곧 깊은 잠에 들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뒀던 여권을 버스 바닥에 떨어뜨렸다.

코칭스태프와 선배들은 막내를 골려주기 위해 여권을 숨겼다. 당황해서 허둥지둥할 모습을 보기 위해 모두가 벼르고 있던 상태. 그런데 곧 맥이 빠졌다. 공항에 도착해 여권이 없어진 걸 안 오상욱이 기대와 다르게 “어 여권이 어디 갔지. 제 여권 보셨어요?”라고 태연한 얼굴로 말해서다.

최근 진천선수촌에서 만난 오상욱은 “선배들이 ‘넌 진짜 충청도 사람이다. 그런 큰일을 당하고도 어떻게 그렇게 둔하냐’고 말했다”며 “여권이 없으면 하루 늦게 가든가 대사관에 연락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상기했다.

실제 오상욱은 이런 재밌는 일화를 말하는 와중에도 감정의 굴곡이 전혀 없어 보였다. 훈훈하지만 무뚝뚝한 얼굴에 간간이 차분한 미소만 떠오를 뿐이었다.

‘둔팅이’ 오상욱은 검만 들면 ‘괴물’로 변한다. 대전 송촌고 3학년이던 2014-2015시즌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랭킹 46위에 오른 오상욱은 4년 만에 랭킹 1위로 발돋움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단체전)과 은메달(개인전)을 따낸 뒤 지난 시즌엔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 도쿄 아시아선수권, 나폴리 유니버시아드에서 모두 2관왕(단체·개인)에 올랐다.

192㎝의 장신에 긴 팔은 상대보다 더 빠르게 포인트를 내는 비결이다. 울퉁불퉁하고 굵은 하체에서 나오는 순발력과 파워는 덤이다. 유럽 펜싱 종주국의 강호들도 오상욱만 만나면 고전한다. 오상욱은 2020 도쿄올림픽에 나서는 한국의 가장 유력한 금메달 주자로 꼽힌다.

사브르는 펜싱 종목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다. 찌르는 동작 외에 ‘베기’도 허용되기에 경기 시작과 동시에 두 선수가 서로 칼을 맞부딪치며 가장 빠르게 승부가 갈린다. 우승을 위해선 강인한 멘털과 평정심이 중요하다. 예민하지 않고 답답할 정도로 침착한 오상욱의 성격은 사브르 종목에 최적인 셈이다. 오상욱에게는 어떤 승부에서도 막판에 끝내 이기곤 하는 무표정하고 냉혈한 고수의 향이 난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강호들이 맞부딪치는 세계대회는 항상 살얼음판 같다고 한다. 오상욱은 “랭커들의 수준은 종이 한 장 차다. 1등이 30등한테 질 정도”라며 “칼을 튕겨서 등을 찍거나 어깨나 옆구리로 우회해서 찌르는 등 끊임없이 다양한 기술로 공략해야 한다”고 밝혔다.

거울 앞에서 칼을 들고 포즈를 취한 오상욱의 모습. 진천=권현구 기자

오상욱은 올 시즌 들어 컨디션이 좋지 않다. 최근 위궤양에 감기까지 겹쳐 석 달을 고생했다. 지난해 11월 이집트 카이로 대회에선 개인전 17위, 지난달 캐나다 몬트리올 대회에선 산드로 바자드(27·조지아·9위)에 발목을 잡혀 5위에 머물렀다.

펜싱 선수였던 형은 그런 오상욱이 의지할 언덕과 같다. 오상욱은 “성적이 안 좋을 때면 형이 ‘진다고 인생이 바뀌냐? 밥 못 사먹냐?’라고 말하며 잘 하고 있다고 위로한다”며 “대회가 끝나면 왜 졌는지 얘기해보라고 말씀하시는 부모님보단 학창시절을 펜싱하며 함께 보낸 형이 편하다”고 말했다.

사브르 대표팀의 가족 같은 분위기도 오상욱에게 큰 힘이다. ‘맏형’ 김정환(37)과 구본길(31·이상 국민체육진흥공단)은 후배들을 동등한 선수로 대하며 격의 없이 어울린다. 개인전에선 서로 가장 강력한 경쟁자지만 노하우를 공유하며 함께 발전한다. “월드 랭커 형들의 노련함과 여유를 보면서 운동해 어릴 때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고마워했다.

주변의 격려와 믿음에 오상욱은 다시 힘을 내며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오는 21일 열리는 폴란드 월드컵부터 5월 서울 아시아선수권까지 거의 15일 간격으로 빽빽하게 대회가 치러진다. 몇관왕 등 무슨 목표를 내걸진 않았다. 최근의 슬럼프를 극복하고 명예회복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다.

오상욱은 올림픽 메달만 추가하면 ‘그랜드슬램(올림픽·세계선수권·아시안게임)’을 이룬다. 하지만 무던한 성격답게 정작 올림픽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진 않다.

“매번 인터뷰 때 올림픽 금메달 따야 한다고 했는데 다 형식적인 말이에요. 솔직히 올림픽이라고 유별나게 여기는 것은 없습니다. 펜싱이 항상 재밌고 새로워서 즐겁게 하면 성적이 따라올 거라고만 생각합니다.”

다만 흰쥐띠 해인 2020년, ‘쥐띠’로서 흰색 도복을 입고 올림픽에 나서게 된 것은 그에게도 신기한 모양이다. 오상욱은 “‘흰쥐띠 해에 올림픽을 하네? 의미 있네?’라고 생각했다. 주인공이 됐으면 좋겠다”며 “개인전은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준비하고, 단체전 금메달은 꼭 지켜내자는 각오로 나설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진천=이동환 기자 hu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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