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내가 빠짐없이 초·중·고교를 다닌 햇수다. 졸업할 때면 개근상을 받곤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아픈 법이 없었지만, 공부에 나름 스트레스를 받던 고등학교 시절엔 간혹 몸이 아팠다. 조퇴할 생각에 교무실에 내려가면, 선생님은 내가 정말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를 꼬치꼬치 물어보셨다. 대답하는 사이 나 자신도 ‘꼭 조퇴해야 하나’ 싶어 조금 더 참자는 마음으로 다시 올라와 버텼다. 미련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참는 법도 배웠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12년을 개근했다. 나 말고도 그렇게 개근한 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개근하면 ‘거지’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일명 ‘개근 거지’.

현재 초등학교에서는 가족여행 등으로 결석 사유를 밝히면, 일정 기간은 가정체험학습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가 있다. 덕분에 가정에서는 이 제도를 활용해 결석에 대한 염려 없이 자녀와 다양한 목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제도의 취지와 별개로 체험학습을 가지 않고 매일 학교에 출석하는 아이들을 가난해서 여행도 못 가는 아이로 낙인찍는다는 점이다. 어른이라고 다를까.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면 미련한 사람 취급받는다. 유튜브로 누구는 한 달에 얼마를 벌었다는 둥, 평범한 직장인이 10년은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을 부동산이 급등해 1년 만에 벌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그러다 보니 꾸준함은 어리석음에 가깝고 재주와 정보를 가진 이가 현자처럼 대우받는다. 그럴 분야도, 그런 사람도 있겠으나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여전히 꾸준함과 성실함이 없으면 엉망이 돼 버린다.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은 패터슨이다. 그가 사는 도시 이름도 패터슨이다. 버스 운전사가 그의 직업이다. 그의 삶은 반복의 연속이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출근하면 똑같은 코스를 운전하고, 퇴근하면 개를 산책시키고 아내와 이런저런 대화를 한다.

첫날과 같은 둘째 날이 반복되고 셋째 날이 반복될 때쯤 관객은 알아차린다. 이 영화가 아무런 사건 없이 이대로 반복하다가 끝날 것임을. 그때부터 정신을 차리고 영화를 보면, 똑같아 보이던 일상에 존재하는 미세한 차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같은 시각의 기상이지만, 매번 자세가 다르다. 버스 노선도 늘 같지만, 다른 승객이 탄다. 아내와의 대화 톤도 조금씩 다르고, 퇴근 후 개를 산책시키는 주변 풍경도 전날과 분명 다르다. 그 속에서 틈틈이 패터슨은 매일 시를 쓴다. 영화가 끝날 때 관객은 알게 된다. 패터슨이라는 도시 속에 사는 패터슨이라는 사람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시라는 것을.

CCM 사역자 한웅재 목사는 ‘일상, 은혜’라는 앨범에서 ‘우둔한 내 시간 속에, 내 사는 일 가까운 거기에, 비좁은 나의 삶 속에’ 주님께서 계시기를 노래한다. 열정적으로 드리는 찬양 중에도 주님은 계시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은 반복된 일상 속에도 주님은 계신다.

우리의 신앙이 기적을 바라기보다 일상이 기적임을 깨달을 때, 이전에 보이지 않던 이 땅의 천사들이 보이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한 주도 빠짐없이 부서에 나와 섬기는 교회학교 교사의 헌신이 기적이요 칠흑 같은 어둠에도 마침내 새벽이라는 빛으로 ‘다시’를 허락하는 매일의 성실함이 기적임을.

하여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기적이 아니라 이미 찾아온 기적을 볼 줄 아는 밝은 눈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손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일 것이다. 땅의 시간과 하늘의 영원이 만나는 때가 바로 오늘이기에 이 하루는 기적일 수밖에 없다.

성현 목사 (필름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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