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출판만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만화가 천계영은 대중의 감성을 건드리는 트렌디한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웹툰 기반 만화 시장에서도 사랑받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2019년 8월 넷플릭스에서 천계영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을 원작으로 한 동명 드라마가 방영됐다. ‘좋아하면 울리는’은 2014년부터 다음과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된 작품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반경 10m 안에 들어오면 ‘알람’이 울리는 애플리케이션 ‘좋알람’이 개발된 후의 사람 관계를 그린 웹툰이다. 2019년 SF어워드 우수상을 받았다. 개인의 감정이 기술을 통해 드러나는 ‘좋알람이 있는 세계’는 ‘좋알람’으로 로맨스가 실현되는 세계이기도 하지만, 결핍과 욕망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세계이기도 하다.

손가락 퇴행성 관절염으로 인해 손으로 만화를 그릴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음성명령으로 웹툰을 그리는 작가의 작업은 SF 전문가 셰릴 빈트가 “기술, 주관성, 역사 및 사회적 힘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라 설명하는 SF의 정의와 어울린다. 삼각관계, 콩쥐·팥쥐와 같은 익숙한 로맨스와 SF다운 사고실험이 한데 어우러진 ‘좋아하면 울리는’처럼 천계영의 작품은 데뷔 이후 지금까지 독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대를 담았다.

시대와 대중성을 조율하는 작가

이화여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천계영은 졸업 후 광고회사에 입사하지만, 광고주 뜻에 맞춰야 하는 작업이 그리 잘 맞지 않았다. 1995년 만화에 뜻을 품고 2년간 근무한 회사를 퇴직한 그는 10개월간 몰입해 만든 ‘탤런트’로 1996년 서울문화사의 ‘윙크 신인 만화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이후 ‘트릭’ ‘컴 백 홈’ 등 중단편을 발표한 뒤 첫 장편 ‘언플러그드 보이’를 연재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 작가 반열에 오른다.

‘언플러그드 보이’는 남자 주인공 현겸이와 사랑스러운 여자 주인공 지율이의 가벼운 로맨스 만화다. 1996년부터 이듬해까지 연재됐으며 외환위기 이전 과잉과 풍요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난 슬플 때 힙합을 춰. 아무도 내가 슬프다는 걸 눈치챌 수 없도록” 같은 현겸이의 대사나 과장된 힙합 패션이 최근 인터넷상의 유머로 소개되곤 하지만, 1996년은 지금과 달랐다. 그해에 그룹 H.O.T.가 ‘전사의 후예’로 데뷔했다. H.O.T. 패션이 ‘언플러그드 보이’를 참고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스타일이 유사했다.

1세대 아이돌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누구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슬픔’이라는 정서와 연결지은 감각은 시대와 대중성을 조율한 천계영의 능력이다. ‘언플러그드 보이’는 H.O.T.와 함께 당대 유행을 주도했다. 10대 청소년 방에는 ‘오빠들’ 브로마이드와 ‘현겸이’ 브로마이드가 함께했다. 1999년 1월 공개한 H.O.T.의 ‘우리들의 맹세’ 뮤직비디오는 천계영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정도였다.

여성만화는 신인 작가가 대중적인 인기작가로 올라서기 쉽지 않았으나 천계영은 달랐다. 천계영은 기존 만화 공식을 따르지 않고, 연애 성공 우정 같은 친숙한 주제를 당대 청소년 독자의 취향으로 재현했다. 현겸이가 80년대 여성만화 속 긴 머리의 남자 주인공 같은 카리스마를 버리고, 힙합 스타일로 무장한 귀여운 캐릭터로 등장한 것처럼 말이다. ‘오디션’(1997), ‘DVD’(2003), ‘하이힐을 신은 소녀’(2007), ‘예쁜 남자’(2009)도 그랬다. 익숙한 이야기를 새롭게 풀어냈다. 그 새로움은 작품의 캐릭터나 플롯, 연출과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사진은 천계영을 스타 작가 반열에 올린 하이틴 만화들. 위부터 ‘예쁜 남자’ ‘하이힐을 신은 소녀’ ‘오디션’. 넷플릭스 제공

출판만화 스타에서 웹툰 스타 작가로

1997년 만화잡지 ‘윙크’에 연재를 시작해 2001년까지 이어진 천계영의 두 번째 연재작 ‘오디션’은 90년대 잡지-단행본 시스템이 발굴한 메가 히트작 중 한 편이다. 최근 유행하는 음악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포맷을 시대를 앞서 활용한 작품이기도 했다. 만화의 대결 구도는 90년대에도 낯설지 않았지만, 최종 승자를 가리는 서바이벌 오디션은 신선한 발상이었다.

90년대 후반 혜성처럼 등장해 ‘언플러그드 보이’와 ‘오디션’으로 연이은 성공을 거둔 천계영은 2000년대 들어 등장한 디지털 방식의 제작과 유통이라는 파도도 외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빨리 변화를 받아들였다. ‘하이힐을 신은 소녀’에서는 3D 프로그램을 원고 제작에 전면적으로 도입했다. 물론 디지털 툴을 만화 제작에 활용한 작가는 많았다. 하지만 3D 프로그램으로 캐릭터를 미리 만들고, 이를 활용해 만화 컷을 만들어 최종적으로 2D로 변환하는 형태의 제작 방식을 구축한 작가는 천계영뿐이었다. 이런 혁신적 시도는 2020년 현재 음성명령으로 만화를 제작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예쁜 남자’는 유통 측면에서도 디지털 전환을 시도했다. 하이틴 만화였던 전작과 달리 성인 취향의 이야기를 인터넷에 연재했으며, 섬세한 선 대신 색을 선택했다. 변화하는 매체와 기술을 수용한 작품임에도 여자의 마음을 훔치는 멋진 남자의 성공담은 낯설지 않았다. 작가는 로맨스 소설이나 TV 드라마에서 변주되던 상투적 이야기를 예쁜 남자 독고마테라는 개성 넘치는 인물과 다양한 미션을 거치는 줄거리를 통해 비껴갔다.

2010년 ‘DVD 2’부터는 다음 웹툰으로 연재 공간을 옮긴다. 2011년 해당 플랫폼에 두 번째로 연재한 ‘드레스코드’는 웹툰을 대하는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만화다. 과거 8~9등신이던 인물 작화를 2~3등신으로 간략하게 바꾸고, 작가가 화자로 등장해 옷 스타일링을 코칭하는 일상만화로, 기존 천계영 작품과는 완전히 달랐다. 다만 작가 스스로 준비하고 노력해 당대 트렌드에 맞춘 작품이었음에도 90년대의 폭발력에는 못 미쳤다. 후속작에서는 작가 본인이 제일 잘하는 익숙한 이야기를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색다른 설정에 녹여내는 작품을 선택했다.

현실 담은 ‘좋알람’의 세계

‘좋아하면 울리는’. 러브알람 제공

2014년 다음에서 연재를 시작한 ‘좋아하면 울리는’은 고등학교 배경의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첫사랑을 회고하며 출발하는 로맨스이지만, 만화의 중심에는 인간관계를 새롭게 규정한 앱 ‘좋아하면 울리는 알람’이 있다. 주인공 김조조 황선오 이혜영 박굴미 천덕구가 사는 세상은 “모두가 좋알람을 쓰는 세계”다. 작품은 크게 세 덩어리로 구성돼있다. 단행본 기준 2016년에 출간된 1~3권은 주인공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이며, 2017년에 나온 4~7권은 그 뒤로 8년이 지난 현재 시점을 그린다. 단행본으로는 아직 출간이 안 된 웹툰 연재분에서는 주인공들이 ‘좋알람’ 기반 리얼버라이어티 쇼 ‘짝!짝!짝!’에 출연한다.

로맨스로 출발한 ‘좋아하면 울리는’의 바탕에는 SF가 깔려있다. 전면에 나온 특정 장르가 다른 장르의 틀 위에서 움직이는 작가 작품에서는 낯선 장르가 서로 섞이며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오디션’은 멋진 미소년들이 나오는 밴드 만화였으면서도 소년만화의 과장된 코믹 대결 구조와 클리셰를 대거 차용했다. 화려한 미소년 캐릭터들이 포진한 일러스트레이션만 보면 작품의 뼈대가 된 소년만화 특유의 과장이 보이지 않는다. 코믹 배틀물의 구조는 화려한 미소년 캐릭터 뒤에서 만화를 끌어간다.

천계영은 ‘좋알람의 세계’를 치밀하게 구성했다. 모두가 완벽하게 좋알람에 종속된 세계 속 캐릭터들의 사랑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인터넷과 SNS가 만든 소통의 문제를 탁월하게 지적한다. 첫사랑은 단지 이런 고민으로 들어오게 하는 문일 뿐이다. SF 우화처럼 보이는 ‘좋알람’으로만 소통하는 만화 속 세태는 사실 가상보다는 현실에 가깝다. 우리는 SNS로 소통하고 누군가의 ‘좋아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좋알람’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건강 문제로 휴재에 들어갔지만, 앞서 소개했듯 작가는 손이 아닌 음성으로 만화를 그리는 대안을 찾았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독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통하는 천계영의 의지는 여전히 꺾이지 않았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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