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황금 좇는 이들에게 더 귀한 말씀 전하다

전염병 순직 부례선 선교사와 충북 영동·청주

지난 14일 충북 영동군 용화면 조동교회 모습. 홍다복 목사가 호두밭 길을 지나고 있다. 오른쪽 예배당이 이 교회 순직 목회자 부례선(제이슨 퍼디) 선교사의 아들 존 퍼디가 참석해 봉헌한 ‘부례선 선교사 기념성전’이다.

충북 영동군 용화면 조동교회(홍다복 목사)는 1912년 개척됐다. 초창기 미국 북장로회 조선 청주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의 순회목회로 예배가 이어졌다. 백두대간 민주지산(1241m) 자락 첩첩산중의 교회다.

이 교회는 1968년 소위 ‘1·21 무장공비침투 사건’ 여파로 정부가 화전민들을 이주시키는 바람에 교인이 줄어 사역자가 없는 공동체가 됐다. 지금은 집이 띄엄띄엄 있고 사람들은 고령화됐다. 때문에 서울 남대문교회 등 도시교회가 농촌봉사 활동과 미자립교회 지원을 목적으로 찾곤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조동교회에 가려면 영동읍에서 2시간이 걸린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읍에서 교회까지 버스교통비가 편도 4500원이었다. 신작로만 간신히 났던 시절엔 채벌 목 운송을 위한 GMC 트럭을 얻어타야 했던 곳이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에는 빨치산과 인민군의 퇴각 통로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주로 영동읍까지 4~5시간을 걸어 다녔다. 그만큼 두메산골이었다.

제이슨 퍼디 (한국명 부례선·1897~1926)

이런 오지에 108년 전 복음이 전래됐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당대 엘리트, 제이슨 퍼디(한국명 부례선) 선교사가 1926년 5월 바로 이곳에서 부임 3년 만에 장티푸스로 순직했다는 것 역시 의아했다.

지난 13일 찾은 민주지산 휴양림 입구의 조동교회. 2013년 부임한 홍다복 목사가 호두 농사를 주로 하는 마을 곳곳을 돌며 어르신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고령 할머니들은 여목사에게 스스럼없이 대했고 홍 목사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신경 쓰며 말씀을 전했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예배당은 여전히 추억이고 성소였다. 그들에게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 환등기 등사판 등은 문명의 설렘이었다. 이날 어르신들은 누구 집 아들이 외지에 나가 목사가 됐고 장로가 됐다는 얘기를 경로당에서 나눴다. 한 남자 어르신은 “내가 젊어선 신약을 달달 외다시피 했어”라고 말했다. 조동교회 청년부를 섬겼다는 그는 외지에서 살다 고향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된다.

1986년 11월 6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충북노회 초청으로 영동 조동교회 ‘부례선 선교사 기념성전’ 봉헌식에 참석한 존 퍼디 목사.

1986년 1월 6일 오전 11시 이 교회에선 특별한 성전 봉헌식이 있었다. 존 퍼디(1925~2007)라는 미국 목사가 참석해 말씀을 전하고 표창을 받았다. 지금의 조동교회 본당은 바로 이때 봉헌된 것이다. 이 봉헌식에서 퍼디 목사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내 마음속 아버지는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 정도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통해 비로소 나의 아버지가 여기 현존했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존 퍼디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순직한 부례선 선교사다. 1926년 5월 조선 내륙 지방에도 장티푸스가 돌았다. 순회 목회를 하던 부례선은 의약품 등을 지고 영동읍을 거쳐 산길을 걸어왔고 사역 중 고열에 시달렸다. 장티푸스에 감염된 것이다. 선교 자료에 따르면 전염병으로 한 사람이 죽어 나간 집에서 하룻밤 머문 것이 감염 원인이라 했다. 부례선은 청주 소민병원으로 후송된 후 차도가 없자 경성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월 14일 별세했다.

1926년 가장을 잃은 부례선 선교사 가족. 두 자녀는 청주 태생이며 아들 존 퍼디(오른쪽)는 유복자였다. 사진은 부 선교사 순직 후 귀국했던 가족이 6년 만에 청주를 다시 찾아 촬영했다.

존 퍼디는 당시 유복자였다. 그의 어머니 에밀리(1899~1992)는 큰 슬픔 가운데 그해 10월 아들을 얻었다. 딸 마르다(1924~2017)를 선교지 청주에서 얻은 후 유복자를 낳은 것이다. 바로 그 아들이 ‘부례선 선교사 기념성전 봉헌식’에 참석했으니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을까.

존 퍼디는 봉헌식 방문 때 아버지의 사역지 조동교회 원 터와 사실상의 순직지를 찾지 못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 터는 현 예배당에서 1.4㎞ 지점 산자락에 있었다. 예배당이라기보다 민가와 비슷한 기도처라고 하는 게 맞겠다. 그 기도처에서 70m 아래쯤에 두 번째 예배당이 위치한다.

조동교회 두 번째 예배당 모습. 1960년 전후로 추정된다.

김태열(67·고산농원 대표) 집사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 아버지가 어느 날 원 터 아래 계곡에서 물을 긷는데 서양 선교사가 나타나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는 얘길 들었다”며 “제 장모님의 친정어머니가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었는데 그 선교사가 부례선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집사의 둘째 누나 김홍렬은 2014년 2월 이집트 성지순례 때 폭탄테러에 희생된 분이다. 큰누나는 두 번째 예배당에서 신식 결혼을 했고 사모가 됐다.

조동교회 주변 금광 시설 흔적. 일제강점기 금광마을 복음화를 위해 교회가 설립됐다.

교회 설립 당시 이 산자락은 ‘노다지’를 캐는 금맥 엘도라도였다. 계곡 곳곳에 사람들이 몰렸고 시간이 지나자 노다지 마을이 형성됐다. 청주선교부는 황금을 좇는 이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고 보고 선교사를 파송했고 그가 부례선이다. 마을 사람들은 교회 설립 이유를 금광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교회사적으로는 금광과 교회의 연관성에 관한 이렇다 할 연구가 없다.

이번 취재에서 ‘금자다리’ ‘금광 사무실’ 등 금과 관련한 지명과 유적이 있다는 김 집사의 기억을 더듬어 홍 목사 등과 현장을 탐사했다. 채금 시설과 콘크리트 흔적 등 일제에 의한 수탈 현장이 가려 있거나 묻혀 있었다.

“어려서 콘크리트 속 쇠를 캐내 농기구를 만들었어요. 쇠를 얻기 위해 콘크리트를 쪼는 제 모습이 가난했던 우리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근처 디밋고지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국군과 인민군의 교전으로 남은 탄피를 주워 쓰기도 했으니까요. 가난한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교회를 통해 배워 대처로 나갔어요.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주 탑동양관 내 부례선 선교사 기념비. 충북기독교역사관으로 사용 중이다.

14일 오후 청주 일신여중·고 및 청주동산교회 일대. 청주선교부가 있던 곳으로 근대기 ‘탑동양관’으로 불렸다. 지금도 부례선목사기념성경학교(현 청주성서신학원) 건물 등 6개동이 등록 근대문화재로 남아 있다. 이 중 포사이드선교사기념관(현 충북기독교역사관) 앞 정원엔 부례선 순직비가 자리한다.

탑동양관 내 청주성서신학원. 부 선교사 순직 후 유가족 등이 헌당한 건물이다.

청주성서신학원은 남편을 잃은 에밀리가 귀국 후 6년 만에 자녀들과 재입국해 남편의 이름으로 봉헌한 성경학교의 후신이다. 나라 잃은 백성이 하나님의 신앙으로 배워 탈애굽하라는 의미였다. 한국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충북노회)는 그 아들 존 퍼디 등 후손을 초청, 영동 조동교회에 ‘부례선 기념성전’을 봉헌하는 것으로 답했다. 이렇듯 말씀과 예배는 빈들이든 산골짜기든 어느 곳에서건 영원하다.

청주·영동=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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