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을 발표한 권여선. 1996년 장편 ‘푸르른 틈새’로 상상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그는 소설집 ‘처녀치마’ ‘안녕 주정뱅이’, 장편소설 ‘토우의 집’ 등을 출간했다.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리문학상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받았다. 문학동네 제공

2018년 5월에 나온 격월간 문예지 악스트에 실린 소설가 권여선(55) 인터뷰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실시간 전략 게임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에 관한 이야기다.

“요즘도 스타 하세요?”

“요즘은 한 게임 하고 나면 초주검 상태가 되니까 주로 보는 걸로 만족하죠. 노비들 테니스 시켜놓고 구경하는 양반처럼.”

“‘그대 안의 불우’를 보면 주인공이 유닛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던데 실제로 그러신가요?”

“스타크래프트 변천사를 보면 초창기에는 맵에 자원이 많지 않아서 유닛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컨트롤하면서 창의적인 빌드로 승부를 했는데 점점 맵들에 자원이 넘쳐나게 디자인되면서 유닛들을 대량 생산해서 대거 쏟아붓는 물량전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시원시원한 맛은 있는데, 예전 게이머들이 SCV나 드론이나 프로브에 대해서 갖고 있던 애착이 없어진 건 좀 아쉽죠.”

스타를 하지 않은 사람에겐 요령부득의 대화처럼 들릴 듯한데, 풀어쓰자면 게이머들이 과거처럼 유닛 하나하나를 치밀하게 다루지 않아 아쉽다는 토로였다. 어쩔 도리 없이 권여선이 작품 속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을 떠올려보게 되는데, 그동안 권여선이 인물을 다루는 태도는 과거의 게이머들처럼 아주 섬세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등장인물에 연민을 느끼거나 공감할 때가 많았다. 가령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2016)의 ‘봄밤’이나 ‘이모’ 같은 단편은 소설 속 인물들이 마주하는 삶의 비의를 통해 많은 독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아직 멀었다는 말’은 소설집으로는 권여선이 ‘안녕 주정뱅이’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2016~2018년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단편 8편을 모았다. 수록작들은 권여선이 일급의 작가라는 사실을 실감케 만드는 작품들인데, 특히 ‘손톱’은 마음 한구석을 알싸하게 만드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엄마도, 언니도 어딘가로 떠나버린 사고무친의 세상에서 애면글면 버티는 한 20대 여성의 이야기다.

작품 속 이야기를 간추리자면 이렇다. 주인공 소희는 서울 외곽 너머에 있는 쇼핑테마파크에서 일하면서 월급 170만원을 받는다. 언니가 들고 튄 대출금 1000만원, 옥탑방 보증금으로 빌린 500만원이 그가 걸머진 빚이다. 소희의 삶이 미세하게 생기를 띠는 순간은 통근버스에서 돈 계산을 할 때다. “대출 상환금이 매달 47만원 나가고, 옥탑방 월세가 40만원이 나간다. 교통비와 회사 식대를 합치면 20만원, 통신료와 공과금과 건강보험료 합이 30만원. 170만원에서 이걸 다 빼면 딱 50만원이 남는다. 이번 달부터는 30만원씩 저금해야 한다. 그러면 20만원이 남는데….” 그러면서 소희는 무시로 통증에 시달린다. 직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절반쯤 날아가 버린 오른손 엄지손톱 탓이다. 소희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삶이 때론 얼마나 구질구질할 수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이 밖에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모르는 영역’은 미세한 균열이 일으킨 파문과, 소통이 무망해지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투병 중인 어머니를 둔 기간제 교사의 삶을 통해 삶의 비애를 드러낸 ‘너머’도 주목할 만하다.

권여선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는 키워드 중 하나는 ‘기억’일 것이다. 소설집에는 어사무사해지는 기억의 끄트머리를 잡고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어떤 순간을 해석하려는 인물도 등장한다. 권여선이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지난해 계간지 문학동네 가을호에 실린 김대성 문학평론가의 글로 갈음할 수 있을 것이다. “(권여선의 소설 속 인물이) 잠자코 앉아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해서 이 행위를 서둘러 성찰적인 것이라 간주해선 안 된다. 이들이 참회나 반성을 하기보단 과거에 과잉 몰두함으로써 현재를 탕진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를 탕진하는 이 과도한 기억하기는 지나간 것을 손쉽게 ‘이해’해버리려는 관성적인 삶의 양식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집 제목인 ‘아직 멀었다는 말’은 ‘손톱’에 등장한 어떤 대화에서 빌려온 것이다. “아직 멀었다”는 미래를 낙관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말이면서 희망의 여지를 계산해보게 만드는 문장이다.

소설가 김애란은 추천사에 이렇게 적었다. “단순한 명암이 아니라 빛을 쪼개서, 어둠을 쪼개서 보여주는 작가를 보며,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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