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은 신작 ‘너 어디에서 왔니’를 통해 한국인의 탄생 과정을 들려준다. 한국인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한 살이 되고 태어나서는 엄마 품에 안기거나 업혀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림은 한국 어머니의 이런 모습이 담긴 채용신의 작품 ‘운낭자상(雲娘子像)’(1914)이다. 파람북 제공

이어령은 비평가 언론인 행정가로 한국 문화사에 선명한 무늬를 남긴 지식인이다. 그에게 붙는 휘황찬란한 수식어는 한두 개가 아니다. ‘한국 지성의 큰 산맥’ ‘대한민국 대표 지성’ ‘문학계의 거장’…. 최근 몇 년간 그는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인터뷰나 강연을 통해 적지 않은 울림을 선사해 화제가 됐었다(그는 투병하는 게 아니라 병과 친해지는 ‘친병(親病)’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령. 파람북 제공

그렇다면 이어령한테 어울리는 수식어를 하나만 고른다면 무엇을 택해야 할까. 그가 내놓은 신작 ‘너 어디에서 왔니’를 읽는다면 거창한 별칭보다는 ‘이야기꾼’이라는 단어부터 떠올리게 될 것이다. 저잣거리의 삶을 기록한 조선 시대의 패관(稗官)처럼, 그 옛날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전기수(傳奇 )처럼 구성진 입담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어서다. 박람강기한 지성과 군더더기 없는 필력을 두루 느낄 수 있다.

‘너 어디에서 왔니’는 이어령이 ‘한국인 이야기’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시작한 시리즈의 첫 책이다.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를 살피는 시리즈로 책에는 ‘탄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한국인 삶에 공통으로 내재된 무언가를 통해 한국인의 탄생 과정을 들려주겠다는 것이다. 이어령이 아니라면 누구도 함부로 도전하기 쉽지 않은 주제인 셈이다.


이야기의 힘

책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지점은 책의 구성이다. 한국인의 임신 출산 육아 과정을 차례로 되짚는 얼개를 띠고 있다. 각 챕터 제목 일부만 열거하자면 이렇다. ‘태명 고개’ ‘배내 고개’ ‘출산 고개’ ‘삼신 고개’ ‘기저귀 고개’ ‘어부바 고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라면서 겪은 경험,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되새기게 만드는 내용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가령 첫머리에 등장하는 태명 이야기부터 보자.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뱃속 아기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일은 한국 특유의 풍습이다. 영어권에서는 태아를 ‘잇(it)’이라는 지시 대명사나 ‘베이비(baby)’라는 보통명사로 부른다. 이어령이 “인터넷 답사”를 해보니 일본이나 중국에도 태명 문화는 없었다(이어령은 과거 젊은이들을 상대로 ‘손가락으로 검색하지 말고 머리로 사색하라’고 외쳤지만 이제는 ‘사색하려면 검색하라’고 말한다).

한데 최근 들어 태명 짓기는 서서히 “지구의 새 풍습”이 돼가고 있다. 태명에 관한 연구 논문을 일별하면 제목에 태명을 한국말 그대로 ‘Tae-myeong’으로 표기한 케이스가 수두룩하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잘 몰랐던 거다. 태명이 한류 현상의 하나라는 것을, 드라마나 K팝보다도 더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는 뜻을, 그리고 그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한국 토박이 막문화의 생명 공감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렇듯 우리네 문화를 새롭게 해석해 그 파워를 들려주는 내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책에 담긴 예시를 더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인은 요람을 사용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민족이었다. 엄마들은 주야장천 아기를 안거나 업어서 키웠다. 엄마와 아기가 몸 전체로 소통하는 “모자 접촉주의”의 힘을 믿어서였다. 이어령은 외국에서 포대기 문화가 인기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포대기는 한류다”라고 적었다. 돌잡이 문화 역시 마찬가지. 일본에도 옛날엔 돌잡이 문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어령은 “우리는 돌상 앞에서 무엇인가를 잡는 것으로 인생을 출발한다. 내 운명을 내가 잡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너 어디에서 왔니’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가질 수 있게 해주고, 그러면서 우리의 미래를 낙관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향연이 끝없이 펼쳐진다. 시쳇말로 ‘국뽕’의 기운이 한가득 담긴 책이라고나 할까. 이어령이 전하려는 행간 사이의 메시지는 한국인만이 지닌 이야기의 힘이다. 아라비아의 천일야화와 달리 한국인이 자라면서 듣는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특징을 지녔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다가 꼬부랑 강아지를 만나….” 이어령은 첫머리에 이런 글을 적어두었다. “천하루 밤을 지새우면 아라비아의 밤과 그 많던 이야기는 언젠가 끝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꼬부랑 할머니의 열두 고개는 끝이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부터 내가 들려줄 ‘한국인 이야기’ 꼬부랑 열두 고개입니다.”

생명화 시대가 온다

한국인 이야기는 2009년 한 일간지에 연재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작업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이어령은 시리즈를 시작한 뒤 뇌수술을 받고 암 선고도 받으면서 한동안 집필에 전념할 수 없었다. 출판사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희수(喜壽 77세)에 잉태되어 미수(米壽 88세)에 늦둥이를 본 셈”이라고 전했다.

첫 책에 등장하는 핵심 키워드를 꼽으라면 아마도 ‘생명’일 것이다. 이어령은 2000년대 시작을 앞두고 새천년준비위원장을 맡았다. 밀레니엄의 첫날인 2000년 1월 1일 세계를 향해 전하는 메시지를 고민하다가 그가 택한 것은 아기의 첫 울음소리였다. “새로운 천 년을 향해 대한민국 즈믄둥이의 우렁찬 첫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자는 취지”였다.

실제로 그는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0.1초 뒤 즈믄둥이의 탄생 순간을 내보냈다고 한다. 이어령은 “다른 나라가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눈에 보이는 거대한 조형물을 세울 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몇조의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생명의 울음으로 새천년을 열었다”고 썼다. 그러면서 정보화 시대 이후엔 생명화 시대가 온다고, 인공지능을 비롯한 과학기술은 산업의 도구가 아닌 “생명 자본”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독자에 따라서는 그의 해석이나 분석이 얼마간 억지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껄끄럽게 느껴질 법한 대목도 없지 않다.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태어난 아기를 두고 “탄생의 자유와 그 권리를 빼앗긴 것”이라고 규정한 부분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누구나 이어령이 가진 지식의 두께를 실감할 수 있다. 말미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어령은 “천시하고 기피해온 속된 말, 막이야기, 막문화를 바탕으로 막인문학을 개발하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이번 책에서 지식을 뽐내지도, 어려운 용어를 들이밀지도 않는다.

시리즈의 후속작으로는 ‘알파고와 함께 춤을’ ‘젓가락의 문화 유전자’ ‘회색의 교실’(이상 가제) 등이 준비돼 있다. 이들 책은 올해 안에 출간된다. 이어령은 뒤늦게 하나님을 믿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영성에 관한 내용은 시리즈 마지막 권에 실린다고 한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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