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다투면 불러다 “다 내 탓입니다” 먼저 용서 구해

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7>

새에덴교회가 1990년 5월 서울 송파구 가락동 개척교회 시절 개최한 ‘예수사랑 큰잔치’. 1부부터 9부까지 열린 행사에는 2500여명이 참석했다.

개척교회 때는 마음에 상처와 한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이들은 교회에 와서 그 한을 풀려고 하거나 더 많은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담임목사를 독점하려 하거나 주목을 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작은 개척교회에도 내부 파워게임이 있다. 그러다 결국 모든 화살이 담임목사에게 오곤 한다. 담임목사와 있지도 않은 관계를 과장되게 말하거나 담임목사가 하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자신을 과대포장하고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마디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질 때가 있다. 성도 수 50명을 턱걸이하다 분란으로 성도들이 흩어져버리거나 100명에서 다시 내려가 버리고 만다.

처음엔 문제가 생기면 성도들을 당장 불러 대질 신문을 했다. 그러다 교인을 잃은 적도 있다. 교인 중에는 경계성 성격을 소유한 사람도 있다. 한때는 담임목사를 너무 좋아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갖고 담임목사를 실컷 욕하며 나가 버린다. 이런 사람은 혼자 조용히 나가지 않고 온 교회를 휘젓고 나가 버린다. 나간 후에도 교인들에게 전화해 나오라고 한다.

그때부터 목사가 먼저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인화 목회, 화목 목회를 추구했다. 교회에서 싸우고 다툰 사람이 있으면 내가 먼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다 제 탓입니다. 그러니 서로 마음을 풀고 용서하고 화해하세요.” 그래도 마음을 잘 풀지 않으면 두 사람을 불러서 성경에 손을 얹게 하고 나도 그 위에 손을 얹고 눈물로 기도했다.

“하나님, 다 제 탓입니다. 저의 죗값으로 사랑하는 성도가 다투고 싸웠습니다. 제가 기도가 부족하고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제 부족함 때문에 성도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위로해 주세요. 우리는 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그 보혈의 강물을 먹고 마심으로 한 피 받아 한 몸 된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사랑으로 모든 상처와 오해를 다 풀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게 하옵소서.”

내가 성경에 손을 얹고 울면서 기도하면 성도들도 어김없이 같이 울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상처가 치유됐다. 그런데 치유가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었다. 부부였는데 교회를 나간다고 선언을 했다. 나가려면 조용히 나갈 일이지 온 교인들에게 전화를 다 돌리며 소란을 일으켰다. 그때 집사람과 함께 그 집에 심방을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이런 노래를 불렀다. “가지 마오. 가지 마오. 나를 두고 가지를 마오. 이대로 영원토록 한 백 년 살고파요. 나를 두고 가지를 마오.~”

부부가 이 노래 한마디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스스로 내면의 상처를 고백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상처받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음에 쓴 뿌리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부부간에도 늘 싸웁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님의 사랑과 열정 앞에 백기를 듭니다. 안 나가겠습니다. 진짜 교회에서 소란 피우지 않고 브리스길라 아굴라 같은 부부가 되겠습니다.”

사실 그들은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건 후에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목회자가 너무 결백해도 안 되겠구나. 때로는 모든 억울함을 뒤집어쓰고 그 아픈 마음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하겠구나. 그래, 눈물은 다른 것으로 닦을 수 없지. 눈물은 눈물로만 닦는 거야.”

그래서 성도의 아픔이 치유 받고 그 영혼이 산다고 하면 맷집이 좋은 목사가 되고 쓰레기통 같은 목사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때부터 무슨 소리가 들려도 참고 인내하며 인화 목회, 화목 목회를 했다. 무엇보다 내가 먼저 사랑하며 섬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니, 교회의 영원한 표어를 ‘사랑하며 섬기는 교회’로 정했다.

강단에서 설교할 때도 누구 들으라고 작심하는 설교를 하거나 상처를 주는 ‘사나운’ 설교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와 우리를 향한 아픈 마음을 전달하는 광대가 됐다. 강단을 개그콘서트 같은 경박한 분위기로 만든 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나 자신을 비하하고 낮추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나님의 사랑과 아픈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생명력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의 가슴을 압도하고 덮어버리도록 했다. 그때 그 사람의 모습을 보지 않고 20~30년 후의 모습을 바라보며 꿈과 비전을 심어줬다.

“우리 교회는 20~30년 후가 되면 5만명, 10만명이 모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교회의 중직자가 돼 있을 것이고 사역 현장의 핵심 멤버가 돼 있을 것입니다.”

▒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왜 선악과나무만 따 먹지 말라 하셨는가


성경공부를 하다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하나님께서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지어 놓으셨는가.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는 따 먹되 왜 선악과나무만 따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

선악과나무는 선악 판단에 대한 지식을 상징하는 나무다. 역사적 실체로서 식물학적 나무이지만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 판단을 상징하고 교훈을 주기 위한 나무였다.

그걸 금하신 이유는 선악에 관한 판단과 지식이 오직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요, 고유영역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인간에게 선악의 지식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 선과 악을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하나님은 선악 판단의 주체가 하나님이 되게 하셨다. 선악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의존하는 존재로 살게 한 것이다. 모든 선악 판단의 주체를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만을 섬기게 한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선악과를 따 먹도록 유혹했다. “야, 너희들 언제까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 거야. 너희들도 얼마든지 독립적으로 살 수 있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혼자 살 수 있어. 그러려면 이 선악과를 따 먹어야 해. 그러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처럼 살 수 있어.”

한마디로 사탄의 유혹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떠나 인간 스스로 자기 경험과 생각에 바탕을 둔 독립적 삶을 살도록 유혹했다. 그래서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해 죽게 된 것이다. 물론 하나님 없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선악의 지식으로 사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됐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분리였고 죽음이고 저주였다.

오늘날 성도들의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다. 선악과를 선택하지 않고 생명나무를 선택해야 한다. 아무리 거듭나고 중생했다고 해도 우리에겐 아직 옛사람의 정욕과 욕구가 남아 있다. 이것이 완전히 폐기되지 않는 이상, 여전히 선악과의 원리로 살아가려는 욕망이 있다. 그게 아주 품격 있고 그럴싸하게 나타나는 게 거룩한 복음의 욕망보다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추구하는 욕구다.

당연히 우리는 도덕적·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도덕과 윤리가 복음의 본질을 앞세우고 눌러버리면 예수님의 풍성한 생명은 결여된다. 그리고 날마다 옳고 그름만 따진다. 그러니까 항상 선과 악을 판단하고 옳고 그름만 추구하게 된다.

또 법 본능으로 나타나 생명과 은혜와 복음의 능력보다 법을 앞세운다. 정말 예수의 생명이 풍성하고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면 당연히 법을 지키고 보편타당한 법의 테두리를 넘어가지 않는 삶을 살게 돼 있다.

그런데 생명과 복음의 능력은 다 잃어버린 채 영적으로는 허수아비 같은데도 날마다 법을 앞세우고 규칙을 앞세우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교회가 서로 다투고 싸우고 분열하는 것이다. 법, 윤리, 도덕보다 하나님이 우선이고 하나님의 뜻과 생명이 먼저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야반도주할 때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까지 훔쳐왔다. 라반이 분을 품고 야곱을 공격하러 가는데 전날 밤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창 31:24)

라반의 선악 판단의 차원에서 볼 때는 야곱이 잘못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라반은 야곱을 용서했다.

교회 생활에서도 선악보다 중요한 게 생명이다. 윤리와 도덕보다 중요한 게 복음의 능력이고 본질이다. 법보다 중요한 게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명나무의 마인드를 성도들에게 훈련하고 교육했다. 그랬을 때 생명의 능력이 온 성도들의 마음을 덮어버리고 휩쓸기 시작했다. 마침내 교회가 생명나무로 가득한 정원이 되고 생명나무 골짜기가 됐다. 그래서 교회가 다투거나 분열하거나 충돌한 적이 없다. 생명나무 공동체를 이루게 된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소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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