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연과 인간이 만든 문명과 공동체가 없이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어려운 환경적 존재이자 사회적 존재이다. 이 때문에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인간이 속한 공동체는 개인의 자아정체성 형성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친다.

먼저, 환경의 영향이다. 짐승들에 의해 길러진 인도의 ‘늑대소녀’는 보통의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다. 다음으로, 공동체의 영향이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부자(父子), 형제와 같은 혈연이나 부부, 동료, 이웃, 동포와 같은 비혈연으로 인해 이루어진 관계 속에서 자아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개인의 자아정체성은 공동체나 인간관계의 영향을 깊이 받고, 관계의 폭이 넓을수록 자아정체성의 폭도 넓어진다. 이 때문에 자아정체성은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이러한 자아관을 ‘연고적(緣故的) 자아관’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회에서 발생하는 불평등 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성별, 인종, 사회적 지위 등 공동체적 요인은 무시하고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자아관을 ‘무연고적(無緣故的) 자아관’이라고 한다.

무연고적 자아관을 내세우는 자유주의는 인간의 진정한 정체성은 지성에 있고 몸은 지성의 욕구와 필요에 부응하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몸과 같이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은 인간의 지성이 만든 ‘환상’에 불과하고 진정한 실재는 지성이라고 주장하는 칸트를 거쳐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해석’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니체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사상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정신이나 인격에서 차지하는 몸의 의미가 점점 사라져 갔고, ‘당신이 느끼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탄생으로 인해 진정한 자아는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자아뿐이며 물리적인 몸은 진정한 자아의 일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아무런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공동체와의 관계에서의 무연고적 자아관’이 아니라 ‘몸과의 관계에서의 무연고적 자아관’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이러한 몸과의 관계에서의 무연고적 자아관은 인간의 몸과 관련된 정책이나 행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보통 사람의 정신이나 인격에 미달된다고 판단된 사람들에 대한 우생학적 단종 조치를 실시하는 데 있어 정책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포태된 날로부터 일정 기간이 지나지 않은 태아에 대한 낙태를 가능하게 만드는 데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 둘째, 끔찍한 고통에 직면한 사람들에 대하여 ‘안락사’나 ‘조력자살(助力自殺)’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

셋째, 몸은 중립적 사물에 불과하므로 성관계는 윤리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어 데이트를 통해 정서적 친밀감을 나눌 것도 없이 만나자마자 바로 성행위에 돌입하는 ‘훅업(Hook-up) 문화’를 성행하게 만들었다. 넷째, 중립적인 몸을 구성하는 생물학적인 성은 인간의 자아정체성에 있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고 오로지 개인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젠더(gender)’만이 자아정체성에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며 트랜스젠더가 되거나 성전환 수술을 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다섯째, 결혼의 개념을 굳이 남녀 간 육체적 결합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정서적 애착만 있으면 된다고 함으로써 동성혼의 인정 근거를 제공했다.

인간의 몸이 인간의 자아정체성에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가 바로 나라는 생각이 극단적으로 가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아마도 ‘네 몸을 사랑하라’의 저자인 낸시 피어시가 걱정하는 대로 “남성의 몸을 가진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성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공중화장실 같은 데서 여성의 공간을 사용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게 되는 등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 사회문화 환경에 대전환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인간의 몸이 인간의 인격이나 자아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는 무연고적 자아관은 신중히 재고돼야 한다. 인간의 몸은 중립적 사물이 아니라 소중히 다루어야 할 선물이다. 어렵겠지만 우리는 정신의 순수성뿐만 아니라 몸의 거룩성도 지켜나가야 한다.

천종호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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