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최초로 오스카를 품에 안은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흑백영화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봉 감독은 지난해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직후 기생충 흑백판을 완성했다. 최근 네덜란드 로테르담영화제에서 흑백판을 처음 공개한 후 “우리 세대는 고전영화를 흑백이라 생각했다. 내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면 고전영화가 될 것이라는 덧없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흑백판 포스터와 예고편은 한층 강렬해졌다. “흑과 백, 넘지 못할 선은 없다”는 카피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전원 백수인 기택 가족의 답답한 현실은 흑백의 질감으로 더 부각된다. 봉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이 한 컷 한 컷 ‘콘트라스트’에 공들인 결과다. 한 화면에서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격차가 클수록 콘트라스트가 강하다고 표현한다. 특히 기택네 가족이 박 사장 집을 몰래 빠져나와 반지하방으로 가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비 내리는 거리, 끝없이 이어진 계단, 비에 젖은 가족들 모습은 흑백의 대조로 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강렬하게 전한다. 한 해외 관객은 “흑백으로 보니까 화면에서 더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색깔이 사라지니까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 섬세한 연기, 감독이 전하려는 메시지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리라.

기생충 흑백판은 당초 지난 26일 국내 극장에서 개봉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확산으로 잠정 연기됐다. 코로나19가 불러온 우리 사회는 색깔을 걷어낸 흑백영화와 닮았다. 특히 확진자가 무더기로 쏟아진 봉 감독의 고향 대구는 더욱 그렇다. 거리는 유령도시처럼 텅 비었다. 사실상 사회 관계망은 차단됐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마스크에 의존한 채 스스로 집안에 격리돼 바이러스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공포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무섭다. 색깔이 사라진 도시, 활기가 없어진 거리, 웃음을 잃은 사람들. 흑백영화처럼 사람들의 두려운 표정과 매일같이 늘어나는 숫자에 촉각이 곤두선 요즘이다.

한승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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