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요나 (1) 고 2때 자는 척 하다 엄마가 계모인 것 알고 충격

방학에 시골집 가니 할머니와 동네 어른 자는 줄 알고 죽은 친엄마 얘기 꺼내

31년째 베트남에서 사역하는 장요나 선교사가 최근 성경책을 들고 베트남 국기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나는 일제강점기의 끝자락인 1943년에 태어났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비켜난 시골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린 시절은 넉넉하고 따뜻하게 보냈다. 내 고향 충남 보령군 웅천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어릴 적 살던 접동골은 대대로 황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지만, 타성바지인 우리 집이 그 동네에서 가장 잘 살았다. 머슴을 열두 명이나 둘 정도로 부유했다.

독실한 신자였던 부모님은 집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교회에 다니셨다.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 가기 위해 수요일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횃불을 들고 밤마실 가듯 교회에 가셨다. 어릴 적 추억 중 절반 이상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태신앙에 유아세례를 받은 나는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교회가 놀이터이자 학교였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계모였는데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많은 핍박을 하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으셨다. 때리면 맞으셨고 욕하면 들으셨다. 새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는 가족 앞에서나 남들 앞에서 할머니의 권위를 세워주셨다.

바람 잘 날 없었던 우리 집은 아버지가 독립하고 나서야 편안해졌다. 충남 광천에서 표백공장을 하시던 아버지는 홍수로 기계를 다 떠내려 보내고, 군산으로 옮겨가서 메리야스 공장을 차리셨다. 우리 가족과 삼촌을 데리고 군산으로 분가하셨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방학식을 마치면 곧장 시골로 가곤 했는데 그때는 마침 장이 서는 날이라 집에 아무도 없었다. 방에 있자니 답답해서 책 한 권을 들고 대추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구성진 노랫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장에 가서 술 한 잔 걸치신 할머니가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집에 오신 것이다. 어르신들은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노랫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그러다 한 분이 내 발에 걸려 넘어지셨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할머니는 손주가 왔다며 반가워하셨다. 나는 어르신들 사이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기가 민망해 계속 자는 척을 했다. 그러다 한 분이 나를 보면서 혀를 쯧쯧 차시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다. “에고,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이렇게 멀끔하게 자란 것도 못 보고…. 애 엄마가 애 몇 살 때 죽었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자는 줄 아셨던 할머니는 죽은 엄마에 대해서 줄줄이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유난히 어머니를 따랐던 만큼 배신감도 컸다. 친엄마가 아닌 줄도 모르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엄마 젖가슴을 만지고 잤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장요나 선교사 약력=연세대 상경대학 졸업. 파월 십자성 부대 복무. 한영기업 대표이사, 벽산그룹 기획실장 역임. 감리교신학대 신대원 졸업 후 1990년 1월부터 베트남 선교사로 사역. 베트남에 교회 312개, 선교병원 16개, 초등학교 2개 등 건축.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