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요나 (2) 한·일회담 반대시위서 학교 대표로 혈서 써

고2때 검정고시로 연세대 상대 진학…정부의 굴욕 수교에 의협심 발동해 시위 주도하다 붙잡혀 경찰서 연행

장요나 선교사(오른쪽)가 1962년 여름 대학교 친구들과 찍은 사진.

그날 밤 할머니는 내게 그동안 숨겨왔던 이야기를 다 해주셨다. 나는 장손도 아니었다. 위로 형이 두 명 있었는데 모두 콜레라로 잃었다고 했다. 나도 약골로 태어나 얼마 못 살 것으로 생각하고 아랫목에 누여 놨는데 신통방통하게 살아났다. 친엄마는 나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셨다.

나는 집을 나오기로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충실하시라 하고, 나는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고 돌아가신 친엄마의 아들로만 살기로 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선생님 댁에 남았다. 아버지의 암묵적 동의로 나를 맡아주신 선생님은 자식처럼 살뜰하게 돌봐주셨다.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인 그해에 검정고시로 연세대 상대에 진학했다. 남들보다 1년 먼저 대학에 간 것이다.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갔지만,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64년도는 한·일협상 반대 운동으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63년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 대통령은 출범과 동시에 한·일 수교를 준비했다. 여론과 상반된 결정이었다. 모든 야당과 사회, 종교, 문화단체 등 저명인사들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한·일회담 성토식을 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그것이 도화선이 돼 서울의 각 대학 학생들도 거리에 나와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나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피가 뜨거웠고 가슴은 정의감으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의 의협심을 부추긴 또 다른 원동력은 여학생들의 응원이었다. 연세대 상대를 대표해 혈서를 썼을 때는 정말 으쓱했다. 손가락 끝을 잘라 ‘한·일회담 반대’를 쓰고 돌아서자 여학생들이 일제히 한숨 섞인 탄성을 내지르며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한 여학생이 뛰어나와 내 상처에 크림을 발라주고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묶어 줬다.

그날 이후 대학 생활의 낭만은 끝났다. 6·3 시위 직후 경찰에 연행돼 졸업도 9월에 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 주동자란 이유로 군대도 남들보다 2년 늦게 보충역으로 가야 했다. 군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엉뚱하게 보충역으로 빠진 것이다. 그것도 내 전공이나 경험과 전혀 무관한 위생병으로 말이다.

내가 근무한 곳은 청주 23육군병원이었다. 병원 업무가 몸에 익어갈 무렵 내 인생의 행로가 크게 휘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병원장의 호출을 받아 가보니 병원장과 간호부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두 사람은 내게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었다. 크리스천이라고 했더니 내게 이상한 종교에 빠진 간호장교가 병원에 있는데 기독교 이단 계통 같다고 했다. 그녀가 이단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책임지고 설득하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난감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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