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요나 (4) 간호장교 피해 파병 간 베트남에서…

전쟁 공포 속 라디오듣다 파병 동생 위해 노래 부른 여인에 반해 수소문 끝 동생 찾고 편지로 사랑 고백

장요나 선교사(가운데)가 1969년 월남전쟁 당시 베트남 나트랑의 십자성부대 감찰부에서 근무할 때 동료들과 찍은 사진.

내가 베트남에 간 1969년에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빈국이었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하고 풍성했다. 피가 튀는 전쟁터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푸른 바다와 눈부신 백사장 곁으로 우뚝하게 키가 큰 야자수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배치받은 나트랑이 한국군 야전사령부와 십자성부대의 주둔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여유가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십자성부대에서 감찰부로 근무하며 감찰검열을 위해 베트남 구석구석을 다니며 전쟁의 참상을 볼 수 있었다. 곳곳에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밀림은 파괴됐고 삶은 궁핍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 완전히 망가지진 않았다. 베트남 사람들은 특유의 생명력과 근면성으로 자신들의 일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데는 교회의 역할이 컸다.

1911년 CMA(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 소속 선교사인 제프레이, 호슬러 그리고 허글러스가 다낭에 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성경 보급, 문서선교, 사역자 훈련 등을 통해 교회의 부흥을 이끌어 온 북베트남은 공산화되기 전까지 기독교 신자가 10만명 가까이 됐다. 나트랑에는 성경신학원도 있었다.

전쟁 중 믿음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베트남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복음을 전했다. 언제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교회를 찾았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는 특별하고도 은혜로웠다. 겉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불안과 공포를 안고 지내는 파월 장병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됐던 것은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내일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베트남 사람들의 평안한 얼굴이었다.

베트남전 참전은 내 인생에 전화위복을 가져왔다.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를 베트남에서 만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에 있는 아내를 라디오를 통해 만났다.

당시 라디오는 내 유일한 벗이었고 고국의 소식을 전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베트남에는 부대마다 주월한국국군방송국이 있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송해씨가 진행하는 ‘파월 장병의 시간’이었다. 아내가 그 방송에 출연해 베트남에서 고생하는 동생과 장병들을 위해 에델바이스를 불렀다.

노래가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목소리가 얼마나 곱고 청아하던지 달콤하고 시원한 물을 들이켠 것 같았다. 마음이 한번 기우니 오매불망 ‘에델바이스의 그녀’ 생각뿐이었다. 결국 베트남에 파병을 와있던 그녀의 동생을 찾아가 사진과 집 주소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진을 보자 더 망설일 게 없었다. 당장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어떻게든 마음을 얻고 싶어 당시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미제 껌을 동봉해 보냈다. 며칠 뒤 도착한 그녀의 편지에서 나에 대한 호감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의 군 생활은 편지를 쓰고 기다리는 일로 채워졌다. 그리고 제대한 뒤에 바로 결혼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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