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내일을열며

[내일을 열며] 나쁜 감독, 좋은 작품?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직장 상사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는데, 보기는 두 개뿐이다. 착하고 무능한 상사와 악하고 유능한 상사. 책 ‘실리콘밸리의 팀장들’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악하고 유능한 사람과 일하려 한다. 나란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최근 유럽 영화계는 예술가의 사람됨과 작품성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작품성이 답이라는 예를 보여줬다. 그것도 아주 극단적인 방법으로.

논란의 주인공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다. 공포영화의 최고봉 ‘로즈메리의 아기’부터 ‘차이나타운’ ‘테스’ ‘비터 문’ ‘피아니스트’까지, 웬만한 영화팬에겐 친숙한 이름이다. 1955년에 데뷔해 지금까지 현역인 86세 노장은 ‘장교와 스파이’라는 신작으로 지난 주말 열린 ‘프랑스의 아카데미상’ 세자르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지난해 9월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거푸 수상했다. 문제는 그가 성범죄자라는 점이다. 폴란스키는 1977년 미국에서 13세의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후 유럽으로 달아났다. 이후 여러 건의 성범죄 혐의가 추가로 제기됐지만 미국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은 나라들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감독상(2003년 ‘피아니스트’), 베를린영화제 감독상(2010년 ‘유령작가’) 등 주요 영화상 트로피까지 착실히 수집하면서. 미투 운동이 없었다면 이번 수상 역시 ‘거장의 식지 않는 창작열에 대한 당연한 응답’ 정도로 근사하게 포장됐을지 모를 일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폴란스키처럼 추악한 범죄를 예술적 업적으로 가릴 수 있을까. 유럽에서는 개인의 삶과 창작물에 대한 평가는 구분돼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한 듯하다. 세자르상이 소수의 심사위원이 아닌 4700명 회원의 투표로 결정된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심지어 ‘페미니스트들의 린치가 두렵다’며 폴란스키가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두고 트위터에 “그가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것을 세자르 측이 방관했다”며 “그날 밤 진짜 ‘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이 어디 있었는지 말해준다”고 썼다.

폴란스키를 아카데미 회원 명단에서 영구 제명한 미국의 분위기는 또 다르다. 시카고 트리뷴은 성폭행 혐의로 수감 중인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이 뉴스를 들으면 ‘어떤 놈은 재수도 좋다’고 여기지 않겠냐며 ‘세자르상의 불명예’라고 비꼬았다. 예술가의 도덕성에 대한 우리나라의 기준은 그보다 더 엄격해 보인다. 세자르 시상식 다음 날 홍상수 감독이 연인인 김민희와 함께한 ‘도망친 여자’로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영화계의 반응과 여론은 온도차를 보였다. 영화계에서는 ‘기생충’에 이은 쾌거라고 받아들였지만 수상 소식을 전한 기사에는 불편하다는 날선 댓글들이 붙었다. 폴란스키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경우인데도 홍 감독의 개인사에 대한 정서가 그의 새 영화가 이룬 성취에 대한 관심을 압도한 것이다. 홍 감독의 영화 제목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빌리자면, 대중적 감정은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리다’인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집안 어딘가에 있을 폴란스키의 옛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굳이 찾아 버리는 수고까지 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그의 작품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올봄 개봉한다는 ‘도망친 여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사태가 끝나면 보러 가지 싶다. 무엇보다 모쪼록 좋은 사람과 함께 영화 보고 마주 앉아 활기차게 영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평안한 일상이 빨리 회복되기를.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