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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이 참담함을 잊지 말자

라동철 논설위원


코로나19 초기 방역 실패로 일상 뒤틀리고 경제적 피해가 불어나는 고통의 터널에 갇혀
지금은 조기 종식을 위해 모든 역량 쏟아부어야 할 때
상황 마무리되면 이번 사태 세밀한 복기로 잘잘못 가리고
감염병 정책과 대응 매뉴얼 보완해 실행에 옮겨야


29번 환자가 시작이었다. 지난달 16일 서울 종로에서 발생한 이 확진자는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도, 기존 확진자와 접촉한 적도 없었다. 방역 당국이 쳐놓은 방역망 밖에서 난데없이 등장한 이 환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의 지역사회 확산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틀 뒤 대구에서 31번 확진자가 나타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19일 하루에 대구·경북 13명 등 15명의 확진자가 쏟아졌다. 31번 확진자가 앞서 예배를 봤던 대구 신천지시설과 신천지 교주 이만희의 형 장례식(1월 31일)이 열린 경북 청도대남병원 관련자들에 대한 전수 조사가 속도를 내자 확진자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5일 오후 4시 현재 전국의 누적 확진자는 6088명, 사망자는 41명이다. 대구·경북 지역 확진자가 전체의 90%지만 경기와 서울도 세 자릿수로 늘어나며 확산되는 양상이다.

정부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게 부메랑이 돼 사태를 악화시켰을 개연성이 크다. 지난달 10일 28번 환자 이후 신규 확진자가 나오지 않자 중앙사고수습본부는 12일 ‘집단행사를 연기하거나 취소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내놨다. 문재인 대통령은 다음 날 경제인 간담회에서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고 했다. 오판이었다. 컨트롤타워가 잘못된 신호를 보내자 시민들은 긴장을 풀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대구 신천지시설, 청도대남병원, 서울 은평성모병원, 부산 온천교회, 천주교 안동교구 등 전국 곳곳에서 집단 감염이 자라나고 있었다. ‘입국 제한을 후베이성 이외 지역으로 확대해야 한다’ ‘슈퍼전파를 염두에 둬야 한다’는 대한감염학회의 경고는 무시됐다. 미국 월스트리스저널(WSJ)의 표현처럼 신천지 집단이 ‘배양 접시’ 노릇을 했다고 해서 정부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2018년 재발한 메르스를 성공적으로 조기 종식시킨 경험과 초기 대응에 대한 과신, 이전 보수 정권보다 낫다는 오만, 경제적 충격을 줄여야 한다는 조급증 등으로 인해 안이하게 대응한 게 사태를 키운 건 아닌지 정부는 되돌아봐야 한다.

초기 방역 실패로 우리는 참담한 고통의 터널에 갇혔다. 환자와 사망자가 급증하고 국민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생산·소비 활동이 위축돼 경제적 피해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국발 여행객에 대해 입국을 금지·제한한 국가가 90개국이 넘는다. 자가 격리, 유치원과 각급 학교의 개원·개학 연기, 복지·문화시설의 무더기 휴관, 졸업식 결혼식 세미나 등 각종 행사 취소나 연기로 일상이 엉망이다.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도 큰 고통이다.

지금은 추가 확산을 막고 환자 치료에 집중해야 할 때다. 코로나19의 조기 종식을 위해 방역 역량을 총 가동하고, 시민들은 위생 수칙과 ‘사회적 거리 두기’를 적극 실천해야 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위세가 심상치 않지만 언젠가는 이 사태가 마무리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번 사태를 초기부터 세밀하게 복기해 잘잘못을 가리고 방역 시스템을 보완해야 한다. 이번 감염병 대응 과정에서 많은 허점이 드러났다. 우한교민들을 임시 수용할 시설 마련 과정에서 혼선이 있었고 감염병 환자를 위한 전문병원과 격리병실, 의료인력을 제때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마스크·방호복 등의 방역 물자 비축과 공급도 부족했다. 개원·개학 연기, 복지시설 휴관 등에 따른 후속 대책도 미흡했다. 감염병 발생 시 최우선 고려해야 할 사항은 방역이고 전문가의 판단이 존중돼야 한다는 것도 이번에 얻은 귀중한 교훈이다. 공공 및 민간시설을 무증상·경증 확진자를 위한 임시 생활치료센터로 전환하고, 중증·고위험군 환자에게 병상을 우선 배정하고, 중복 구매 확인 전산시스템을 활용해 마스크를 공평하게 배분하는 등 새로운 시도들은 더 세밀하게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재난이 닥치면 다들 목소리를 높이고는 상황이 끝나면 금세 잊어버리는 집단 망각을 또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지금 느끼는 참담함, 분노, 공포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감염병 정책과 대응 매뉴얼을 보강하고 실행에 옮길 동력을 유지할 수 있다. 기후변화로 기온이 상승해 세계적으로 감염병 발생이 잦아지고 있다. 코로나19보다 감염력이 강하고 치사율이 높은 신종 감염병이 언제 덮쳐올지 모른다. 더 이상 소를 잃지 않으려면 외양간부터 제대로 고쳐야 한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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