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요나 (7) 나이 마흔 넷에 원인 불명 희소병으로 식물인간

경력 바탕으로 건설사업 시작 사업 커지며 매일 업자들 만나 접대 주일까지 접대로 술 취해 자고났더니…

장요나 선교사는 40대 중반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사진은 2002년 분당서울대병원에서 강직성 척추염 판정을 받은 장 선교사.

해고가 돼도 할 말이 없는 사건이었지만, 그동안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터라 회장님은 다시 기회를 주셨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로 비상사태가 일어났다. 벽산그룹은 뜻하지 않게 세무사찰을 받아 큰 어려움을 겪게 됐다. 나는 기지를 발휘해 그 사건을 잘 해결해 회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했다.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80년대 초반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준비하느라 대형 공사가 많았다. 벽산그룹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건설업에 뛰어들어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을 수주받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돈은 원 없이 벌었다. 옥외광고회사도 차려 전국의 시계탑 광고를 독점했다. 물 쓰듯 돈을 쓰며 흥청망청 세상 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지만 마음은 텅 빈 것 같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쓸쓸함에 외롭고 허전했다. 그때마다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해운대 바닷가를 배회했다. 그때 교회를 다니지 않은 건 아니다. 모태신앙인 나는 예배가 삶의 일부와 같았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예배드리는 종교인일 뿐이었다. 그래서 술 냄새를 풍기며 교회에 가도 창피한 줄 몰랐고, 축도가 끝나자마자 술집으로 직행해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주일에 꼭 교회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느슨해졌다. 업자와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는 평일보다 여유 있는 주말에 접대하는 게 유리했다.

마침 그날도 주일이었다. 아침부터 업자들과 모임이 있어서 예배를 빠지고 부산 범어사 계곡으로 향했다. 절 앞 계곡에 있는 야외식당이 목적지였다. 주로 닭백숙을 팔았는데 가족들이 아닌 이상은 대부분 하루 놀 작정으로 온 사람들이라 백숙을 시켜놓고 고스톱판을 벌였다. 나도 업자들이 기분 좋게 이길 수 있도록 비위를 맞추며 고스톱을 치고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 숙소에 돌아와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왼쪽 뺨이 얼얼해서 만져보니 차가운 게 내 살 같지 않았다. 그래서 숙취로 인해 잠시 안면 마비가 온 거로 생각하고 우황청심환을 하나 물고 출근했다. 그런데 회사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려는데 손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눈도 뻑뻑하고 말도 어눌해졌다. 다리마저 풀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 바로 김해공항으로 출발했다.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다 받았는데 거기서 정신을 잃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희소병. 이게 한 달 만에 의사가 내린 결론이었다. 혼수상태에 전신 마비가 된 내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의사 앞에서 아내와 가족은 망연자실했다. 그 사이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강남 성모병원,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다녔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멀쩡한 몸으로 나갔는데 한 달여 만에 식물인간이 돼 집으로 실려 왔다. 그때 내 나이 44살, 큰아들은 중학교 1학년이었고 둘째 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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