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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김종인과 누런 강의 노트

오종석 논설위원


화려한 경력과 탁견을 갖춘 ‘선거의 달인’ 80세 노정객을 통합당이 꽃가마로 모시려 해
강산은 네 번 변했는데 보수와 진보 오가며 또 선거 지휘하나
미래와 국민의 삶을 보지않고 결과에 치중하는 정치 현주소


1980년대 중반 대학에 다닐 때 정치학을 가르치던 노 교수님의 누런 강의 노트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언뜻 경륜과 깊이가 느껴지기도 했다. 명성 있던 그 교수님은 매년 같은 노트로 비슷한 강의를 하고 있다고 조교 선배가 말했다. 군사정권 당시 ‘서울의 봄’을 지나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엄청난 정치적 변화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 교수님의 강의 노트는 변하지 않았다.

미래통합당이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상임선거대책위원장으로 모시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다. ‘선거의 달인’으로 불리는 김 전 대표는 선거 때마다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아왔다. 그는 4년 전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의 승리를 견인했다. 2016년 1월 문재인 당시 대표의 영입제안을 받아들여 비대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총선을 지휘했다. 그보다 앞선 2012년에는 새누리당(통합당 전신)과 박근혜 대선 캠프에 영입됐다. 국민행복추진위원장 겸 경제민주화추진단장을 맡아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친손자다. 서강대 교수 출신인 그의 정치이력은 화려하다. 전두환 군사정권 당시인 5공화국 때 집권여당인 민정당 국회의원(11, 12대)을 지냈다. 노태우정부 때는 보사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거져 여당인 민자당 의원(14대)으로 활동했다. 보수당에 뿌리를 둔 그가 진보정권인 노무현정부 당시에는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의원(17대)으로 다시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그는 보수와 진보를 갈아타며 대선과 총선을 지휘했다. 20대(더불어민주당)까지 비례대표로만 5선 국회의원을 지낸 그가 2017년 4월에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가 1주일여 만에 포기하기도 했다. 이후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던 그를 통합당이 다시 꽃가마로 모시려고 한다.

그는 화려한 경력과 함께 탁견을 갖춘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동안 각종 선거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만큼 무시할 수 없는 존재임은 분명해 보인다.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 등을 주창하며 어느 정도 경제 개혁에 기여한 점도 인정할 부분이다. 중도층 표심을 얻기 위해 사활을 거는 통합당이 그를 총선에 끌어들이는 이유는 더 있다. 그의 경제민주화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을 만들자는 쪽에 가깝다. 경제 개혁과 관련한 그의 시각은 보수와 진보의 중간쯤에 위치한다는 평이 나온다. 단호한 정치적 결단력과 함께 혁신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백전노장인 그는 12일 통합당에 ‘공천 잡음’을 해결해야 수락할 수 있다며 계속 몸값을 높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통합당의 삼고초려를 받아들일 경우 그가 이번 4월 총선에서도 압승의 선물을 안겨 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대한민국 상황에서 또 ‘김종인 모시기’가 꼭 필요한지 궁금하다. 40년 전 정치판에 뛰어든 그를 다시 소환해 제1 야당의 선장으로 21대 선거를 끌고가려는 상황이 다소 의아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강산이 변해도 네 번은 확 변했지 않은가. 특히 그가 확연히 다른 정치역정을 보이는 보수와 진보를 오가면서 대한민국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도 왠지 씁쓸하다.

21대 총선은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낮춰지면서 정치권이 ‘젊은 정당’임을 자임하고 청년층을 겨냥한 공약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공천도 20, 30대 청년층을 많이 배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 전 대표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발을 담글 때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세대다. 그들에게 선거를 총지휘하는 80세 노정객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의문이다. 해외에서는 30대가 총선이나 대선을 이끌고 정치 지도자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금융을 중심으로 경제 시스템이나 산업 현장은 매년 혁명에 가까울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세상을 바꾸고 우리의 생활 자체도 시시각각 변화시키고 있다.

총선은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시민의 대변자, 사회를 올바른 미래로 선도할 정치지도자를 뽑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치판은 아직도 과거에 멈춰 있는 듯하다. 꼭 통합당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래보다는 과거에 안주하고 국민보다는 정파에, 과정보다는 결과에 치중하는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가 답답하다.

오종석 논설위원 js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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