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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추적기④] “우린 포르노 아니다” 함께 싸우는 여성들

n번방에 잠입하다 ④ 싸울 준비가 된 그녀들, 감시자 리셋의 탄생

1회. 텔레그램에 강간노예들이 있다
2회. “신검 받는 중ㅋ” 자기 덫에 걸린 놈
3회. ‘약한’ 남성일수록 성착취에 집착한다
4회. “우린 포르노 아니다” 함께 싸우는 여성들

지옥을 본 건 나만이 아니었다. 텔레그램 n번방의 가학적 이미지에 지쳐갈 무렵, 알게 된 이들이 있었다. 함께 지옥에 잠입한 동지들. 성착취가 일어나는 텔레그램 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진짜 감시자들. 여성단체 ReSET(리셋)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 텔레그램에는 가해자만 활개치는 게 아니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리셋의 탄생

처음 리셋의 존재를 알고 접촉했을 때 그들은 인증을 요구했다. 리셋은 텔레그램 속 루저들이 미성년 피해자들의 신상을 알아내고 유포하며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위험과 함께 사는 그들은 낯선 이의 접촉을 극도로 경계했다.

리셋은 지난해 12월부터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리셋은 최초로 10만명의 동의를 얻은 ‘텔레그램 디지털 성범죄 국회 청원’을 올린 A씨가 만든 단체다. 20대 여성 여럿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알려진 건 여기까지다. 그들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 어떤 경로로 모여 어떻게 할동하는지는 모두 대외비다. 단체 내부에서 서로의 신원이 공개돼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철저한 비밀주의다. 텔레그램 가해자들의 또 다른 타깃이 되지 않고, 오랫동안 피해자와 연대하기 위해 그들은 익명을 택했다. 리셋은 취재진과도 공식 SNS로만 연락을 주고 받았다.

A씨는 지난해 말 텔레그램에서 벌어지는 성범죄 사건을 접했을 때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노만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일단 아이들부터 살리자. 성착취가 일어나는 텔레그램 방 링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링크를 발견하는 족족 본사에 “방을 없애 달라”고 신고했다. 접수가 제대로 됐는지, 처리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했다. 그 과정에서 채증한 자료는 모두 경찰에 넘겼다.

하지만 혼자는 역부족이었다. 방은 하루에도 수십개씩 생기고 또 사라졌다. 신고를 했지만 여전히 운영되는 방도 수두룩했다. 지난해 12월 5일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에 함께해주실 분들을 구합니다’라는 공지를 올렸다. 같은 달 16일 공식 계정을 열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24시간 365일’ 감시는 계속된다

리셋은 24시간 텔레그램에 산다. 범죄가 일어나는 방을 찾아내고, 그들이 올리는 영상과 사진을 지켜본다. 처음에는 신고하는 것조차 막막했다. 무작정 사이버수사대 홈페이지에 링크 몇 개를 첨부해 가해 사실을 신고했다. 얼마 후 경찰로부터 ‘자료를 들고 관할 서로 오라’는 문자가 왔다. 멍했다. 경찰이 말하는 자료란 게 무엇인지, 어떤 자료를 얼마만큼 어떤 형식으로 들고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성범죄 특성상 수사진행 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것도 답답했다. 그나마 신고라도 접수되면 다행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는 제3의 제보자가 접수시킨 신고인 탓에 경찰은 리셋의 증거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리셋은 “사태 초반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경찰에서 신고를 반려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계속 두드려야 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많이 변했다. 사건이 공론화되고 리셋의 정보를 신뢰하게 된 경찰은 신고 절차를 획기적으로 단축시켜줬다. 곧장 전담팀으로 연결되는 루트를 공유해줬다. 지금은 하루 평균 50건 넘게 신고한다.

“우리는 싸울 준비가 돼 있다”

리셋은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들은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심리적 취약함을 파고드는 패배주의 집단”이라며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현실에서 성취를 이뤄본 적 없고 승리를 해본 적도 없는 이들이 부담 없이 가해를 일삼을 수 있는 텔레그램으로 숨어든 것”이라며 “신고를 하면 그들은 분명 겁을 먹는다. 장담한다”고 말했다. 아직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런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당신들에게는 싸울 준비가 된 우리가 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경찰을 향해서는 “경찰은 피해자가 가장 먼저 만나는 조력자”라며 “피해자가 싸우고자 했을 때 함께 싸우려는 태도로 신뢰를 줘야 한다. 수사를 통해 범인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자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출발은 전화 한 통이면 된다. 리셋은 여성단체 어디에라도 전화를 걸어 “도와 달라”고 말하라고 했다. 그 다음은 믿고 맡겨도 좋다. 체계적인 보호 아래 현재 많은 피해자가 치료를 받으면서 가해 상황에서 벗어났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도 “피해자들은 세상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아니다. 도와줄 사람이 있다”며 “상담소에 피해 사실을 알려도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언제든 열려 있으니 그곳이 어디든, 어느 상담소든 찾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국회는 뭐하고 있나

리셋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지난 9일이다.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최근 A씨가 올린 국회 청원 덕에 ‘텔레그램 성착취 법안’이 통과됐다는 기사가 쏟아졌는데 들여다보니 사실이 아니었다고 했다.

리셋은 “청원 취지가 반영됐다는 성폭력 처벌 특례법 개정안에는 ‘딥페이크’ 처벌 관련 조항만 포함됐다”며 “딥페이크는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디지털 성범죄 유형 중 하나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딥페이크란 특정인 얼굴 등을 합성한 편집물이다. 성노예, 신상 유포 등 온갖 성범죄 중 딱 한 가지 유형만 추가된 것이다. 리셋은 “청원 취지를 반영해 다양한 디지털 성범죄를 아우를 수 있는 개정이 이뤄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회. 텔레그램에 강간노예들이 있다
2회. “신검 받는 중ㅋ” 자기 덫에 걸린 놈
번외편. 노예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3회. ‘약한’ 남성일수록 성착취에 집착한다

특별취재팀(with 추적단 불꽃) onlinenew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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