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대유행하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생필품 사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호주 일본 등 선진국이라 자부해 온 국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빵, 분유, 생수, 화장지, 상비약 등을 싹쓸이해 가는 바람에 대형 마트의 진열대가 텅 비었다. 생필품을 서로 먼저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볼썽사나운 모습도 보인다. 생필품이 가득 담긴 카트를 끌고 계산대로 향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읽힌다. 각국 정부가 ‘이웃을 위해 멈춰 달라’고 호소하지만 사재기 열풍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풍경은 다르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나서 한동안 마스크와 손세정제 매점매석이 있었지만 일반 생필품 사재기는 거의 없었다. 확진자가 대량으로 쏟아진 대구·경북과 부산·경기·충청권 등 일부 지역에서 라면, 즉석밥 등의 사재기가 잠깐 나타났지만 곧바로 사라졌다. 대형마트든, 슈퍼마켓이든, 전통시장이든, 온라인 쇼핑몰이든 평소와 다름 없이 필요한 물건을 마음껏 구입할 수 있다.

사재기가 없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생필품 생산·유통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사재기의 유혹을 떨쳐내는 힘이다. 그 밑바탕엔 국가 시스템과 정부에 대한 신뢰, 공동체를 생각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는 1차 북핵 위기로 전쟁 가능성이 고조된 1994년 6월 서울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사흘간 사재기가 나타났지만 이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1999년 6월 15일과 2002년 6월 29일 제1, 2차 연평해전이 터졌는데도 사재기 현상은 없었다. 북한이 연평도를 무차별 포격한 2010년 11월 23일 일부 지역에서 조짐이 있었지만 다음 날 바로 잦아들었다.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위기에서도 사재기를 하지 않는 한국 시민들에게 세계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자긍심을 가져도 될 것 같다.

라동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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