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고 있다. 일찍이 누군가 정치인들이 굽신거리면서 국민의 뜻을 찾을 때는 이제 선거철이라는 신호고 선거만 끝나면 그다음 선거 때까지 다시는 국민을 찾지 않는다고 했다. 선거를 통해 유권자를 대리하라고 뽑힌 대통령이나 의원이 대체로 국민의 의사와 다르게 임기를 보내다 보니 대의 민주주의는 좀처럼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 등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에 기초한 뉴미디어는 대의 민주주의에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미할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뉴미디어는 실시간으로 광범위한 소통을 가능하게 해준다. 누구나 뉴미디어를 통해 소통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아무런 검열없이 무궁한 주제에 대한 소통을 누릴 수 있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이 일방향적인 하향식 소통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뉴미디어를 통해 정부나 국회가 국민과 직접 소통하고 의견을 수렴하며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유권자 반응을 집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뉴미디어에 의한 소통도 근본적으로 메워질 수 없는 정보 격차의 골이 깊다. 뉴미디어에 익숙하지도 접근조차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소수의 뉴미디어 사용자가 근거 없는 정보를 퍼뜨려 혹세무민하거나 여론조작, 나아가 선동까지 할 수 있다.

미국 백악관의 국민청원을 본떠 시작된 청와대의 국민청원은 21세기판 신문고이기도, 흔들리는 대의 민주주의의 보완책이기도 하다. 힘없고 억울한 백성이 직접 나라님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 때로는 의미 있는 정책대안을 올린다. 청와대의 국민청원은 1∼2년 전부터 몇몇 광역시도의 청원제도로 이어졌고 2020년 1월부터는 국회의 온라인 국민동의청원제도로 확산됐다. 뉴미디어를 통해 유권자가 자신의 대의기관과 직접 소통하고 정책결정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광역시도의 청원은 지역이기적인 민원이 많고, 1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 처음 성립된 국회청원은 다름 아닌 대통령 탄핵청원이었다.

국회의 국민동의청원이란 법률 제정이나 개정, 또는 국정현안 및 부당한 행정처분 등 국가기관의 권한에 해당하는 사항에 대해 국민이 의원의 도움없이 청원하는 제도이다. 30일 안에 10만명의 동의가 따르면 국회의 절차가 시작된다. 기존의 의원 소개청원과 마찬가지로 소관위원회, 즉 해당 상임위원회나 특별위원회에 회부된 뒤 심의와 표결을 거치는 것이다. 만약에 10만명 이상의 유권자가 찬성한다고 바로 본회의로 가서 표결되는 것이라면 의원은 거수기에 그치게 된다. 다양한 인기영합적 의견이 국민동의청원으로 앞을 다퉈 국회에 접수되는 것은 다른 부작용의 하나다.

국회가 국민의 선호나 희망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고 정당이 공약했던 것에 응당한 책임을 지지 않으니 국민이 아프고 가려운 것을 직접 해결하려고 팔을 걷어붙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특히 국회가 정쟁이나 자신의 기득권을 스스로 지키려는 차원에서 미뤘던 입법안을 국민이 직접 챙기려는 노력도 등장했다. 그 정점에 국민발안을 통한 개헌이 가능해지도록 먼저 이 조항을 포함시키는 개헌을 하자는 흐름이 있다. 이에 따르면 선거권자 100만명이 참여하면 개헌안을 제출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개헌안인데 이미 여야 의원 148명이 서명했다.

한국에는 지방자치 수준에서 직접 민주주의 방안으로 이미 주민발의, 주민감사, 주민투표, 주민소송, 주민참여예산, 주민소환이 제도화돼 있다. 국가 수준에서는 국민투표나 국민청원만 제도화되었기에 국민발안과 국민소환도 추진되는 중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국민소환제와 같이 매력적인 제도가 실시되는 국가는 극소수에 그친다. 국민소환이 정적을 제거하는 정치적 도구로 변해 국가적 갈등으로 비화할 소지를 없앤 것이다. 국민발안제가 채택된 국가는 그보다 더 많지만 여전히 소수다. 그나마 인기영합적 법안의 남발을 막기 위해 국민발안은 소관위원회의 심의부터 받도록 돼 있다. 한국에서도 국민소환제나 국민발안제 도입 전에 부작용까지 막는 장치를 제도화해야 하는 이유다.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이 역대 국회마다 막혔으니 국민이 개헌안을 직접 발안하자는데 이것도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뉴미디어를 장착한 국민이 입법과 개헌에서 의원과 직접 경쟁하면 대의 민주주의에 긴장도 생기고 국회의 생산성도 높아질까.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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