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상이 ‘잠시 멈춤’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자발적인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됐다. 몇 주째 주일 예배도 온라인으로 드리고, 집과 직장 이외 대부분 사회 활동이 중단됐다. 일상적인 소비가 멈추자 누군가의 일자리도 멈춰버렸다. 대치동 학원가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한 지인은 “오전엔 우유배달, 오후엔 식당일로 생계를 이어왔는데 현재 자동으로 자가격리되고 있다”며 “장기화될까 불안하고 걱정”이라고 말했다.

매일 아침 휴대전화에서 알람이 울린다. 앱에서 업데이트된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 그리고 완치자를 숫자로 알려준다. 숫자를 확인하고 안도하거나 불안해한다. 마치 숫자가 현재를 증명하는 듯하다. 하지만 숫자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안타까운 죽음, 누군가의 고통을 전하진 못한다. 코로나19로 남편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같은 병으로 입원 중이라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는 아내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한다. 사실 지금은 누구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전 국민의 잠시 멈춘 일상이 언제 ‘새로 고침’으로 회복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견뎌야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장기화되면서 마음의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사회적 우울 현상을 뜻하는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온라인에선 ‘상상 코로나’에 시달린다는 호소 글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목이 아픈데 코로나가 아니냐” “검사 결과 음성인데 검사를 다시 받고 싶다”는 내용들이다. 바이러스의 마지막 방어선은 우리 몸의 면역체계이다. 몸은 마음과 연결돼 있다. 마음이 불편해지면 몸의 면역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다음 날 감기몸살에 걸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마음에도 항체를 심어줘야 한다.

먼저 일상의 멈춤 속에 나를 돌아보는 ‘침묵의 시간’을 가져보자.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이 나쁜 감정이 아니라 위기관리를 도와주는 감정 신호로 이해하고, 그동안 너무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았는지, 고통받고 아파하는 이들을 잊고 살았는지, 자연을 돌보거나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는지,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 없이 살았는지, 물질만을 생각하며 생명과 자연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는지 돌아보자. 성경적 침묵은 무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불의를 냉철하게 직면함과 동시에 그 불의를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이다.

또 사회적 거리는 두되 사람들 간의 ‘마음의 거리’는 줄이자. 인간은 유대관계를 통해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단절되면 해결되지 않는 정서적 결핍이 생긴다. 홀로 사는 부모님이나 친지들, 경우에 따라서는 확진으로 격리된 동료들에게 안부를 전하자. 일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한 장소에 오래 머무는 것은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가벼운 운동과 스트레칭, 자신의 느낌과 생각 정리하기, 음악 듣기, 6~8시간 충분히 수면 취하기 등 집 안에서도 스트레칭을 하거나 몸을 움직이면 기분이 전환된다. 이번 코로나19 이후 또 어떤 바이러스가 인류를 찾아올지 모른다. 바이러스가 내성을 키우는 만큼 우리도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

이번 코로나19의 감염력을 통해 한 사람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실감했다. 반대로 나 한 사람이 그만큼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남의 탓을 하고 누군가 혐오하는 대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선택하자. 삶과 생존의 문제에 짓눌린 채 헤맬 때 무엇이 원인이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안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또 마음 따뜻해지는 선행으로 면역력을 키울 수 있다. 내가 처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분명 할 일이 떠오를 것이다. 면 마스크를 만들어 기부하거나 소형 임대교회의 임대료를 지원해주는 한국교회, 의료진에게 핸드크림과 편지를 보낸 세월호 유족들,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기부받아 나누는 구세군 자선냄비 등을 바라보면서 우린 분명 이 어려움이 지나면 더 성장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구약성서 ‘욥기’에서 욥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믿음이란 연료가 계속 태워져야 우린 희망할 수 있다.


이지현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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