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의 탈북 러브스토리 오륜 금메달로 완성할 것”

[And 스포츠] 유도 국가대표 이문진

유도 국가대표 이문진이 지난해 10월 25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2019 아부다비 그랜드슬램 남자 81㎏급 결승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뒤 눈을 꼭 감은 채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연합뉴스

유도 국가대표팀 트레이너 이창수(53)씨는 원래 북한의 각광받는 유도 선수였다. 8년 동안 국제대회 메달만 17개를 따내 북한에서 공훈체육인 직위까지 받았다. 1990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의 정훈(51) 전 감독에 패해 은메달에 머문 뒤 수난이 시작됐다. 귀국 뒤 곧장 삼진탄광으로 보내진 이씨는 670m 깊이의 갱도 속에서 석탄을 퍼냈다. 같은 공훈체육인이었던 당시 체육부 차관의 견제로 훈련도 못한 채 평양 유도팀 식당의 보일러 떼는 일을 떠맡기도 했다. 이씨는 1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동물만도 못한 취급을 했다”며 “자식들은 그 땅(북한)에서 키우면 안 되겠단 생각을 처음 한 계기”라고 떠올렸다.

차갑기만 했던 이씨의 마음을 녹인 건 대만 유도 대표 진영진씨였다. 이씨의 기술에 반한 진씨는 국제대회에서 만날 때마다 이씨에게 선물 공세를 했다. 또 대만의 유학생에게 한국어까지 배워 이씨에게 말을 걸었다. 북한 국적 탓에 ‘왕따’처럼 지냈던 이씨는 곧 진씨와 사랑에 빠졌다. 견우직녀처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애타는 상황. 이씨는 결단을 내렸다. ‘한국에 가서 널 찾을게’란 메시지를 진씨에 남긴 뒤 1991 스페인 세계선수권 도중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한국 대사관으로 곧장 돌진해 망명 신청을 했다. 대만 신문에서 소식을 접한 진씨가 한국에 오면서 둘은 이듬해 결혼에 골인한다. 남한의 재벌 상속녀와 북한의 장교가 국경의 장벽을 넘어 사랑에 성공하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같은 러브 스토리다.

이문진(왼쪽)과 유도 대표팀 트레이너인 아버지 이창수씨가 18일 진천선수촌 유도장에서 도복을 입고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이문진 제공

유도 남자 81㎏급 국가대표 이문진(25·블루나눔필룩스)은 그 사랑의 결실이다. 부부는 아들 셋을 낳았고, 모두 유도 도복을 입었다. 차남 이문진은 보성고 재학 시절 각종 대회 금메달을 싹쓸이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상대방을 위에서 눌러 제압하는 굳히기는 그의 주특기였다. 이문진은 16일 “어렸을 때 학교 훈련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가족들과 유도를 했다”며 “아버지와 장난치면서 배운 굳히기가 어느새 경기를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는 나만의 무기가 돼 있었다”고 떠올렸다.

앞날이 창창해 보였던 이문진에게도 고교 졸업 후 긴 슬럼프가 찾아왔다. 습관성으로 오른쪽 발목을 접질려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 게다가 같은 체급엔 김재범(35·은퇴), 왕기춘(32·은퇴), 이승수(30·한국마사회)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문진은 2016 리우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왕기춘을 누르고 3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선배들의 벽을 넘지 못했다. 번번이 국내 선발전에서 고배를 마시며 국제대회에 나서지 못한 것. 또 2018년 용인대 졸업 후엔 입단하려 했던 실업팀에서 계약을 미뤄 반 년 동안 국내 대회에도 출전하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문진은 “은퇴까지 고민했을 정도로 힘들었다”며 당시 심경을 전했다.

벼랑 끝에 기회가 찾아 왔다. 유도에 목말랐던 이문진에게 독도 스포츠단이 6개월 단기 계약을 제시했고, 이후 국내 대회에서 메달을 따내자 신생팀 블루나눔필룩스의 최민호(40) 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안정된 환경 속에서 이문진은 발전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 최 감독은 힘을 빼고 상대를 잡는 방법부터 움직임과 방어법, 외국 선수를 상대하는 노하우까지 모든 지식들을 제자에게 전수했다. ‘굳히기로만 이기는 반쪽짜리 선수’로 평가받던 이문진은 그렇게 서서 메치는 움직임까지 날카롭게 벼렸다. 아버지와 스승으로부터 남북 유도의 장점을 모두 흡수해 ‘완전체’로 거듭난 것.

역경 속에서 꽃이 핀 건 지난해다. 7월 나폴리 하계유니버시아드에서 은메달을 따낸 뒤 금호연(60) 국가대표팀 감독의 눈에 들어 10월 처음으로 국제대회(아부다비 그랜드슬램) 출전 기회를 얻었다. 랭킹 406위 이문진은 이 대회에서 세계 4위, 6위의 랭커들을 모두 한판으로 잡아내며 금메달까지 쾌속 질주했다. 국제유도연맹(IJF)이 대회 종료 후 ‘무명선수가 국제 유도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고 묘사했을 정도. 이문진은 “가족들이 집에서 경기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동영상을 보내줘 저도 울컥했다”며 “더 잘해야겠단 마음이 커진 순간”이라고 말했다.

유도 81㎏급 국가대표 이문진(오른쪽)이 18일 진천선수촌 유도장에서 2020 도쿄올림픽 본선 진출 티켓을 따내기 위한 열띤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이문진 제공

이문진은 이제 올림픽을 바라본다. 아버지 이씨와 어머니 진씨 모두 올림픽과 인연이 없어 올림픽 메달은 가족의 ‘숙원’과 같다. 이문진은 현재 올림픽 랭킹 37위로, 남은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하나만 따도 올림픽 진출 하한선인 랭킹 28위 안에 들 수 있다. 다만 랭킹 34위 이성호(28·한국마사회)도 함께 28위 안에 들면 국내 선발전을 거쳐야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다음달 말까지 모든 국제대회가 취소된 상태지만 이문진은 5월 아제르바이잔 그랜드슬램 출전을 목표로 매일같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아들을 옆에서 가르치기 위해 직장에 사표를 내고 2017년부터 대표팀 트레이너를 하고 있는 아버지 이씨의 존재는 이문진의 심리적 안정에 큰 도움이 된다.

이문진은 “제가 올림픽 금메달을 따야 부모님의 인생 드라마도 완결될 것 같다”며 “출전만 하면 금메달 딸 거라는 자신감이 있다. 우선 출전 조건을 갖출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아버지 이씨도 “아들 셋 낳고 유도시킨 게 잘한 결정인 것 같다”며 “훌륭하게 커준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 뿐”이라고 화답했다.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