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광희 (2) ‘낮의 목회자’와 ‘밤의 목회자’… 부모님은 내 삶의 멘토

지역 사회와 교계에서 존경받는 부모님… 자녀인 나에게는 늘 큰 부담으로 자리해

‘한국의 그룬투비’로 불린 이준묵 목사가 1999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뒤 김수덕 사모와 넷째 딸인 이광희 디자이너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부모님 잘못 만나 그런 것 같다’는 말은 부모님을 향한 존경을 극대화하기 위한 반어적 표현이다. 아버지 해암 이준묵 목사와 어머니 김수덕 여사는 한반도 땅끝인 전남 해남에서 평생 고아와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며 사셨다. 해남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각각 ‘낮의 목회자’와 ‘밤의 목회자’라 불렀다.

지역 사회와 교계에서 존경받는 분들이었지만, 자녀인 내겐 가슴 한편을 누르는 부담으로 자리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아버지가 이준묵 목사’라고 세상에 밝힌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부모님 이야기부터 꺼내는 이유는 그분들이 내 삶의 정신적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부모님에 대한 나의 기억이 희미하기에 여러 사람에게 들은 얘기들을 모아 보았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일생을 기독교 가르침 안에 사셨다. 한 언론사 기고문에서 아버지는 7살 때 겪었던 고난을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다리에 고름이 차 걷지 못하게 됐다. 어머니가 다른 치유 방법을 찾지 못해 굿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 굿을 할 수는 없다’며 어머니를 설득했고, 결국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던 광주 제중병원을 찾아가 수술을 받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버지 수술비는 선교사들이 대신 부담했다. 학업도 중학교 2학년을 마친 뒤 중단했다. 대신 광주YMCA에 들어가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낮에는 농촌에서 일을 도우며 선교했고 밤에는 빈 창고에서 기도했다. 아버지가 목회를 위해 본격적으로 신학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22살 되던 해인 1932년이다.

후원자는 아버지에게 하나뿐인 형이었다. 큰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나는 육의 지도자가 될 테니 너는 영의 지도자가 되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큰아버지는 일본의 공장에서 일하며 기술을 배운 뒤 고국으로 돌아와 사업가로 성공했다. 그분이 바로 호남비료와 아세아자동차를 세운 이문환 회장이다.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일본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다녀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의 연을 맺게 한 것도 큰아버지였다. 부모님 모두 하나님 일에 헌신하는 삶을 선택해 결혼엔 뜻이 없으셨다고 한다. 큰아버지가 광주 제중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소개했고 두 분은 1939년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는 빈민 목회를 위해 결혼하자마자 신부를 홀로 둔 채 중국으로 떠나셨다. 2년간 중국에서 빈민 사역을 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해방되던 해 정월 해남읍교회에 파송됐다. 해남의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교회는 초가지붕의 초라한 건물이었고 할머니 교인 10여명이 전부였다. 어쩌면 내가 2009년 남수단 톤즈의 황폐한 땅을 만났을 때와 같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그곳 해남에서 정년퇴직까지 50여년간 한 교회만 섬기셨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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