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광희 (3) 하나님 뜻 실천하신 ‘한국의 그룬트비’ 나의 아버지

평생 해남읍교회 한 곳만을 섬기고 목회 외에도 교육과 농촌계몽에 기여… 행동으로 이웃 사랑 보여줘

이준묵 목사가 1960년대쯤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전남 해남의 집 앞마당에서 찍은 사진.

아버지는 평생 땅끝인 전남 해남, 한 곳만 섬기셨다. 해남읍교회 목회 외에도 ‘하나님 사랑·땅 사랑·이웃 사랑’이라는 모토 아래 삼애농민학원을 세워 영농기술을 보급했고 해남에 기독교청년회(YMCA)도 설립하셨다. 6·25전쟁 후 1953년부터는 해남등대원을 세워 고아들을 보살피셨다. 등대원은 지금도 운영된다. 과부나 장애인은 물론 소록도에 못 들어간 한센인들까지 3년간 해남에서 손수 돌보셨다. 해남유치원 해남고등공민학교 해남수성경로대학 해남장애인종합복지관 등을 설립하거나 운영하셨다.

사람들은 교육과 농촌계몽에 나서며 ‘덴마크의 아버지’라 불린 니콜라이 그룬트비 목사의 이름에서 따 아버지를 ‘한국의 그룬트비’라 부르곤 했다.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도 격동의 현대사를 살며 만나거나 겪은 100인의 인물을 쓴 ‘100년의 사람들’에서 아버지를 “해남사람치고 이준묵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고 기억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우체국에 도착한 편지의 겉봉엔 수신인 주소도, 우표도 없이 ‘하나님 전 상서’라고만 쓰여 있었다. 우체국장은 어떻게 처리할까 망설이던 중 해남읍교회 목사가 떠올랐다. 아버지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고 있던 터라 편지를 가져왔다.

편지에는 “하나님! 저는 지금 공부를 무척 하고 싶습니다.… 그 길이 열린다면 신명을 바칠 테니 부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처럼 도와주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학업을 이어가고 싶은 아이의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아버지는 수소문해서 편지를 쓴 사람을 찾았다. 해남읍내에서 한참을 더 들어간 산골 마을에서 만난 소년은 집이 워낙 가난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는 소년을 데려와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고등학교까지 마친 후 전남대 의대에 들어갔다. 훌륭한 의사가 되려면 신학 공부부터 해야 한다고 판단한 청년은 한신대에 진학했다. 이후 스위스 바젤대에서 신학을 공부해 한신대 총장의 자리에 올랐다. 오영석 전 총장 이야기다.

아버지는 늘 꾸준하셨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일생 새벽기도를 거르신 적이 없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 3시면 일어나 미암산이라는 뒷산에 올라 늘 같은 바위에 무릎을 꿇고 깊은 기도를 드리셨다. 오 총장도 새벽기도에 오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고 했다. 오 총장은 고등학생 시절 새벽기도를 따라다니며 아버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를 드렸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아버지 등이 백설로 덮이기도 했단다.

아버지의 끈질김은 일기를 봐도 알 수 있다. 10대 말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70여년 동안 거의 매일 거르지 않고 쓰셨다. 지금 펼쳐보면 믿음의 다짐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까지 솔직하게 쓰신 게 놀라울 따름이다.

아버지는 1973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에 취임해 교단을 이끌었고, 7년간 한신대 초대 이사장을 지내셨다. 그러나 목회는 해남읍교회만을 섬기셨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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