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낮아져 이번 총선에서 첫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고 잔뜩 기대에 찬 모습으로 말하는 너를 보며 문득 1985년 아빠의 첫 투표를 떠올렸단다.

대학생으로 처음 투표에 참여했을 때는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권위주의 정부 때문에 정치활동이 어려웠던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막 해금되었어. 급히 만든 야당은 선거준비 부족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복원을 바라는 국민 열망에 힘입어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서 집권 여당을 앞서기도 했단다. 힘을 회복한 야당이 요구한 대통령 직선제는 2년 뒤 전 국민적 민주화 운동의 결과 받아들여졌고, 다음 해 총선에선 야당의 눈부신 약진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등장했어. 유권자들의 선택으로 세상이 조금씩이나마 바뀌는 것을 경험하며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던 때였단다.

첫 투표의 기대가 부풀었던 너는 도대체 누구를 뽑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고민에 빠졌었지. 뽑고 싶은 후보가 어느 쪽에도 보이지 않는다며 말이야. 코로나바이러스로 더 어려워진 국민 삶을 챙기고 청년의 미래를 함께 열어줄 능력과 진정성을 가진 후보는 어디에 있냐며 한숨을 쉬는 너를 보며 아빠도 가슴이 답답했단다.

사실 이번 총선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구나. 유권자의 다양한 선택을 보장한다며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위성정당을 동원한 거대 정당의 몸집 불리기 경쟁 때문에 취지가 바래버렸지.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공정하게 했어야 할 선거구 획정도 거대 정당의 표 계산에 졸속으로 이뤄져 눈살을 찌푸리게 했어. 가장 볼만했던 것은 국회의원 후보 공천이 아니었나 싶어. 여야를 막론하고 야단법석을 떨며 번복에 번복을 거듭한 결과 내놓은 후보들 중에는 막말과 구설수로 애초부터 탈락됐어야 할 후보들이 수두룩하지 않았니? 스스로 천명한 공천 원칙을 어기고 야합과 거래, 당 지도부의 독선과 전횡으로 객관성과 공정성을 스스로 포기한 정당에 민주주의 발전을 맡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

후보자 등록을 마치고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실망은 더욱 커졌어. 전 국민이 숨을 죽이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감당하는 엄중한 상황에서 후보들은 오직 더 많은 표를 얻고자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있기 때문이야. 생계를 위협받으며 힘들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국민들에게 도움과 위로를 주려는 노력보다는 상대 후보를 헐뜯고 약점을 찾아내기에 혈안이야. 게다가 서로 힘을 합쳐야 할 때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분열과 갈등을 일삼던 이들이 이제는 표에 눈먼 포퓰리즘적 주장에 서슴없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급기야 유세장에서 폭력과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우리 국민들이 이러려고 그동안 민주주의를 위한 고난과 희생을 감수했나 싶더구나.

주변 친구들의 정치 무관심과 냉소를 걱정하는 너를 보며 아빠는 그간 계속 약해진 청년의 정치적 영향력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더구나. 아빠의 첫 투표 당시 20대 유권자는 전체 3분의 1이 넘는 가장 큰 집단이었고 20대와 30대를 합치면 절반이 훨씬 넘었단다. 그런데 35년이 지난 지금 20대 유권자는 15%도 안 되는 가장 작은 집단이고 50대 이상이 절반에 가까워. 그래서 그런지 이번 선거 후보자 평균 연령도 57세로 가장 높아졌지. 오죽하면 20, 30대 유권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후보까지 나올까 싶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의 청년 투표율이 서구나 일본을 훨씬 앞선 것은 다행이야. 게다가 최근 들어 청년 투표율이 계속 높아진 것도 주목할 변화야. 예전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지만 역시 참여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지.

첫 투표를 앞둔 네게 아빠는 너의 선택이 그간 후보들이 여기저기에서 쏟아낸 말이 아니라 애써 노력하고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하기를 권하고 싶단다. 신중하게 말하고 신속하고 단호하게 행동하는 사람일수록 시급한 문제 해결에 앞장설 가능성이 높거든. 후보들이 그간 해온 말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말과 행동 중 무엇이 앞서는지, 말과 행동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할 것도 권하고 싶구나. 그들이 그간 내뱉은 빈말과 거짓, 저주에 휘둘리지 않고 잊지 않는 유권자가 늘어날수록 정치인의 언행도 그만큼 신중하고 올바르게 바뀔 것이기 때문이야.

한준 (연세대 교수·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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