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헌 남자배구 대표팀 감독이 삼성화재 감독 시절이던 2017년 1월 19일 수원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배구 V-리그 한국전력과의 경기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한국배구연맹 제공

“모두가 이란이 3대 0으로 이길 줄 알았는데 한국이 2세트나 따내 놀랐다.”(카타르 센터) “한국은 서브와 수비 대형이 좋았다. 우리가 서브를 넣을 길이 없어보였을 정도다.”(이란 감독)

한국 남자배구 대표팀은 지난 1월 2020 도쿄올림픽 아시아대륙 예선 준결승전에서 이란에 2대 3으로 패해 올림픽 티켓을 아쉽게 놓쳤다. 하지만 세계랭킹 8위팀을 상대로 막판까지 물고 늘어진 분투에 국내 팬들 뿐 아니라 상대팀까지 박수를 보냈다. 20년 만의 올림픽행엔 단 2점 부족했지만, ‘절반의 성공’이라 평가받을 만 했다.

대회가 끝난 지 석달째. 임도헌(48) 남자대표팀 감독은 아쉬움을 털어내고 다시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목표로 장기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7일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지난 예선전을 ‘지도자로서 겪은 가장 큰 경험’으로 정의했다. 그는 “귀국해서 2주간 잠을 못 잤다. 뒤척이다 일어나 집사람에게 ‘티켓 하나가 남았다. 훈련하러 가야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했고, 그 방향이 맞다는 확신을 얻은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임 감독은 2006년부터 신치용 감독(현 진천선수촌장) 밑에서 프로배구 삼성화재 수석코치를 하며 7연속 우승을 보좌한 뒤 2015-16시즌부터 감독직을 맡았다. 초보 감독은 자신의 색깔을 팀에 온전히 입히지 못했다. 첫 시즌 3위에 그쳤고, 두 번째 시즌엔 팀이 포스트시즌 진출에도 실패해 임 감독은 2년 만에 사퇴하고 말았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크고 작은 실패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후 삶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임 감독이 이번 예선전에서 소정의 성과를 이뤄낸 건 실패를 인정하고 변화를 꾀했기 때문이다. “프로감독 2년은 실패한 거죠. 감독직을 놓은 뒤 왜 실패했는지 고민했고, 저부터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변화의 키워드는 ‘자율’과 ‘규칙’이었다. 임 감독은 선수들을 ‘끌고 가는’ 지도자였다. 감독-선수의 수직적 관계에서 감독은 ‘명령’을 담당했다. 임 감독은 실패 원인을 여기서 찾았다. 수평적인 문화에서 성장해온 젊은 선수들에게 과거 방식만 고집할 순 없었다.

임 감독은 대표팀에서 과감히 변화했다. ‘서브 범실을 몇 개 이상 줄이자’는 식으로 팀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고, 선수 개개인에 역할을 인식시켰다. 실행은 선수들의 몫이었다. 주장 신영석(현대캐피탈)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규칙을 만들도록 독려했고. 경기력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도 갖게 했다. 자발적으로 목표에 도달하도록 하고, 결과에 대한 피드백을 정확하게 줘 선수들이 책임감을 갖게 한 것이다.

‘열린 자세’도 주효했다. 배구 감독은 코트 안의 기술·전략에 대해선 전문가지만 다른 분야에까지 능통할 순 없다. 임 감독은 심리학자·트레이너들에게 자문을 구해 필요한 부분을 접목시켰다. 임 감독은 “조세 무리뉴 감독, 존 우든 코치의 책과 인터뷰를 찾아 읽으면서 감독은 원칙을 명확히 제시하되 목표에 도달하도록 선수 편에 서서 도와주는 ‘열린’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임 감독이 얻은 건 한국배구가 본연의 강점만 발휘한다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의 장점은 수비와 연결, 잔기술이다. 힘과 높이가 중요한 블로킹과 공격에선 떨어지지만,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한다면 세계 수준과 격차를 줄일 수 있단 것이다. 이란과 대등하게 경기를 했던 것도 연타와 리바운드 플레이를 강한 수비력으로 모두 받아낸 뒤 정확한 이단연결을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표팀 소집 기간이다. 유럽 2m 장신 군단의 블로킹은 V-리그 블로킹보다 훨씬 높고 깊다. V-리그에선 9m 앞을 보고 때려도 포인트가 났다면, 국제대회에선 10m 이상을 보고 빠르게 밀어 쳐야 공격 각도가 나온다. 상대 선수들의 강한 공격과 연타를 방어하는 연습도 필요하다. 리그와는 다른 방식에 적응하고 손발을 맞출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임 감독은 “협회와 연맹, 구단 등 여러 주체들이 있기 때문에 감독님들을 만나 좋은 아이디어들을 들으며 협조와 이해를 구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임 감독은 4년 뒤 올림픽까지 내다보며 엔트리를 구상 중이다. 순차적으로 세대교체를 하며 선수들이 오랜 시간 대표팀에서 국제무대 공략법을 습득할 수 있도록, 청소년까지 30여명의 선수들을 선정해 대표팀을 경험하도록 할 생각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잠잠해진다면 대표팀은 8월 22일 미얀마 아시아배구연맹(AVC) 컵대회에 나선다.

임 감독은 “선수들의 영상을 돌려보며 어떻게 훈련하고 피드백을 줄지 장단점을 정리 중”이라며 “6월 말쯤 발표될 명단을 기반으로 대표팀을 운용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올림픽이 1년 연기되면서 선수들은 7월 중순쯤부터 AVC컵까지 긴 시간 진천선수촌에 모여 연습할 수 있게 됐다.

지난 1월 7일 중국 장먼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아시아대륙 예선 B조 1차전 호주와의 경기를 앞두고 임도헌 감독(오른쪽 네 번째)을 비롯한 대표팀 선수단이 포즈를 취한 모습. 장먼=이동환 기자

9일 시상식을 끝으로 일정이 종료된 V-리그에서 임 감독이 눈여겨본 선수는 박준혁(현대캐피탈)과 황경민(우리카드)이다. 임 감독은 “박준혁은 높이와 블로킹이 좋아 몇 년 뒤엔 기량이 더 발전할 만한 자원이고, 황경민은 리시브와 경기운영능력이 좋았다”고 말했다. 임동혁 오은렬(이상 대한항공) 손주형 전진선(이상 OK저축은행) 김명관(한국전력) 구자혁(현대캐피탈) 등도 차세대 주자로 꼽힌다.

이번 올림픽 예선전에선 해외 각국 감독·선수들이 영어로 교류하는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 한국은 그 부분에서 미흡했다. 임 감독은 앞으로 해외 지도자들과 소통하고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유튜브에 올라온 영어 교육 영상을 시간 날 때마다 듣고 있다. 임 감독은 “머리가 녹슬었는지 처음엔 힘들었지만 100번을 들으니 영어 억양까지 따라하게 됐다”며 웃었다. 그렇게 임 감독은 또 다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임 감독은 특유의 소탈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각오를 밝혔다. “선수들도, 저도 많이 배웠던 예선전이었습니다. 선수들과 함께 열린 마음으로 발전해 다음에는 과정만이 아니라 결과도 좋게 만들겠습니다.”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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