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광희 (5)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로 맺어진 부모님

독신으로 복음 전하겠다는 어머니와 빈민사역 준비하던 아버지의 만남

이준묵 목사와 김수덕 사모가 1936년 5월 결혼식을 올린 뒤 찍은 기념사진.

어머니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학교에 들어갔지만, 학비는 직접 벌어야 했다. 손뜨개질을 하고 자수를 놓고 삼베를 짜기도 해서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자신의 학비를 대는 것은 물론 어려운 친구를 돕는 데도 사용했다. 학교에서는 종을 치는 아르바이트를 하셨다. 어머니가 “종을 치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시험 볼 때가 가장 힘들었다. 종을 치려면 남들보다 시험을 빨리 봐야 했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어머니는 학창 시절부터 일평생 마음속에 새기고 외우는 말씀이 있었다.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였다. 간호학생 시절 기숙사 벽에 이 말씀을 적어서 붙여 놓고 늘 보면서 지내셨다고 했다.

매산여학교를 졸업한 뒤 어머니는 광주제중병원(현 기독병원)의 간호훈련소에서 자격을 취득해 간호사가 됐다. 우리나라 1세대 간호사로 환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셨다. 결혼은 평생 하지 않을 생각이셨다. 신학을 공부해 온 세계를 다니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의 길을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딸의 결정을 존중하셨다. 지금의 부모들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게 됐다. 아버지는 당시 고베신학교의 파송을 받아 만주에서 빈민사역을 하기 위해 선교사로 떠날 준비를 하고 계셨다. 결혼한 첫날 밤 각자 좋아하는 성경말씀을 외웠는데, 아버지가 통곡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독신으로서 오직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신명을 바치기로 했는데 결혼을 했으니 예수님보다 아내를 더 사랑하지 못할 것 같아 울었다고 했다.

박근원 한신대 명예교수는 부모님의 결혼을 ‘진취적 독신을 꿈꿨던 어머니와 신앙적 유형이 비슷한 아버지가 만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두 분의 신혼은 짧았다. 결혼식을 올리고 사흘 뒤 아버지는 혼자 중국 산동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걸인과 길거리 청년들을 위한 선교 사역을 했다. 어머니는 병원으로 가서 어려운 병자들을 위해 일하셨다.

1945년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오시면서 두 분은 외진 곳이었던 땅끝 마을 해남으로 내려가셨다. 그 땅에서 해남읍교회 사역뿐 아니라 지역사회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업들을 시작하셨다. 6·25전쟁 직후 고아와 거지, 과부, 정신병자들이 쏟아졌던 암흑의 시대에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그중 하나가 해남등대원이다. 고아원 대신 등대원이란 이름을 쓴 것은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세상을 밝히는 등대가 돼라’는 의미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놀라운 사역에 그림자처럼 빛도 없이, 소리도 없이 오로지 깊은 기도와 침묵, 그리고 미소로 내조하셨다. 아버지도 살아생전 입버릇처럼 “나의 목회 70%는 아내가 해 준다”고 말씀하셨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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