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광희 (6) 어머니가 ‘밤의 목회자’라 불린 사연은

밤이면 산모나 병든 사람·굶는 사람들 집 찾아다니며 쌀·옷 등 슬며시 두고와

1956년 전남 해남 사택에서 집안일을 하는 이준묵 목사와 김수덕 사모의 모습을 등대원 학생이 지켜보고 있다.

어머니는 등대원 아이들과 당신 자식들에게 공평한 사랑을 베푸셨다. 아니 등대원 아이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셨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안타까우셨던 것 같다. 1968년 어머니의 일기에도 등대원 아이들을 향한 애달픈 마음이 녹아있다.

“나는 언제나 등대원의 아이들이 걱정이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인정이, 그리고 사랑이 결핍돼 있다.… 병들고 무능한 엄마라도 아이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랑의 대상일 것이다.”

어머니는 등대원 아이들의 자긍심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뜻한 바에 의해 태어난 귀한 사람”이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해주셨다.

아이들을 향한 사랑은 성인이 된 뒤에도 이어졌다. 6·25전쟁 때 황해도에서 홀로 피난온 10살 아이는 등대원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군에 입대했지만, 상사들의 괴롭힘에 탈영했다. 어머니는 청년이 심한 벌을 받을까 몹시 걱정됐다. 1960년대는 탈영병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무겁게 처벌받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솜으로 바지 안에 넣는 엉덩받이를 만드셨다. 부대에 복귀하면 엉덩이에 매를 맞는다는 말씀을 들어서였다. 청년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의 엉덩받이 선물을 받았고 부대로 복귀한 뒤 무사히 전역했다.

어머니의 사랑은 고아나 가난한 이들에게만 향한 게 아니었다. 해남은 소록도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한센인들 사이에 “이준묵 목사님 집에 가면 재워주고 먹을 것, 차비도 준다”는 소문이 퍼졌다. 우리 집을 찾은 그들을 어머니는 거리낌없이 씻겨주고 먹이고 재우셨다. 해남에 있는 양로원 ‘평화의 집’과 어린이집 ‘천진원’도 어머니가 만드셨다.

가난한 시골 교회라 가족조차 먹고 입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계속 몰려왔다. 어머니가 당시 쓴 기도문을 보면 이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 저 사람들을 저한테 손님으로 보내 주셨으면 저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건강과 물질도 저한테 허락해 주세요. 하나님의 심부름을 더 잘할 수 있게요.”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하실 때는 그 일을 할 사람을 선택한다고 생각하셨다.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심부름이라 생각하셨던 어머니는 그 심부름을 잘하게 해달라고 늘 기도하셨다.

밤이면 동네도 거니셨다. 산모나 병든 사람, 끼니를 굶는 사람의 집 앞을 찾아다니며 쌀과 옷가지 등을 슬며시 놓고 돌아오셨다. 이런 일도 있었다. 누군가의 대문 앞에 봇짐을 두고 돌아서려는데 신음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온 가족이 앓아누워 있었다. 간호사 출신인 어머니는 이들을 응급조치하고 돌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돌아오는 길에 순찰을 돌던 경찰에게 통행금지 위반으로 걸려 하룻밤을 경찰서에서 보내야 했다.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를 ‘밤의 목회자’라 불렀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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