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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48.1㎝

조효석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역대 최고로 긴 투표용지라고 했다. 사전투표 첫째 날이던 지난 10일 인근 주민센터에 가서 받은 노란색 비례정당 투표용지는 48.1㎝, 팔 한쪽 길이에 조금 못 미쳤다. 주방에서나 쓰던 위생장갑을 받아 낀 채로 길고 긴 종이를 더듬어 투표할 정당을 찾고 인주를 찍었다. 막상 찍고 나니 어떻게 가지고 나와야 할지가 또 난감했다. 인주 자국이 안 보이게 접자니 한 번 접어선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긴 종이를 그대로 질질 끌고 나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종이를 돌돌 말다시피 해서 가지고 나와 투표함에 밀어 넣었다. 색다르다면 색다른 경험이었다.

역사상 가장 긴 투표용지가 상징하는 건 이번 선거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엉망’이라는 의미일 테다. 거대 양당은 정치에서 중요하다던 대의와 명분도, 품위도 내팽개친 채 저마다의 얕은 정치공학에 따라 대놓고 이합집산을 했다. 선거운동의 방점은 지지자들이 자기편 비례정당을 어떻게 찍도록 할 것이냐에 모아졌다. 지향하는 가치를 내세워 지지를 요청하는 게 아니라 오직 ‘우리 편’에게 더 많은 의석을, 권력을 달라 아우성이다. 이념의 스펙트럼이 넓지도 않은 나라에서 뽑아 달라는 정당이 서른다섯 개에 이른다는 자체가 웃지 못할 희극이다.

거대 정당이 대놓고 위성정당을 만들며 편법을 주도하자 학습효과로 더 많은 정당이 생겨 두 정당에 줄을 섰다. 더불어 미래 열린 통합 민주 등 비슷한 단어가 반복되는 게 많아 어지러울 지경이다. 이 혼동조차 의도했을 이름이라 생각하니 더 기가 막힌다. 엄연히 다른 두 야당에서 서로의 공천을 두고 반란이니 진압이니 하는 낯부끄러운 소동이 벌어졌다. “정부의 성공을 위해 굽이치다 다시 한 바다에서 만날 것”이라는 표현이 한때 청와대의 입이던 언론인 출신 후보의 입술에서 나왔다. 누구를 대변할지, 어떤 공공의 가치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는 말하는 이가 드물다.

이런 선거가 되어서는 안 됐다. 이번 선거는 역사상 처음 청소년인 만 18세가 투표장에 갈 수 있는 기회다. 어른들이 입맛대로 정한 정책에 미래를 내맡겨온 청소년들이 한국 정치사에 제대로 된 정치 주체로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멀쩡한 정치였다면 그들의 이익을 어떻게 대변할 것인지를 더 고민했을 것이다. 대다수 청소년이 처한 입시지옥을 어찌 극복할지, 차별받는 특성화고 학생들을 위한 대책이 뭔지가 더 중요한 의제가 되고 각 정당 공약집 맨 앞에 빠짐없이 등장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 투표용지만 쥐여줬을 뿐 정치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약속했는지 아직 모르겠다.

그간 한국 정치사에서 설 자리가 모자랐던 소수정당의 입장에서도 이번 선거는 역사적 전환점이 됐어야 했다. 지향하는 공공의 가치보다는 인물, 인물보다는 정파에만 초점이 맞춰졌던 지금까지의 정치사가 크게 뒤흔들려야 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양 거대 정당 때문에 이번 선거는 정파가 정당보다 우선시된다는 걸 이전보다도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리가 됐다. 소수정당의 설 자리는 외려 좁아질지 모른다. 양 거대 정당의 알량한 계산 덕에 한국 정치는 이전보다도 더욱 가치보다 정파를 따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정치학계 원로 심지연 경남대 교수의 명저 ‘한국 정당 정치사’의 부제는 ‘위기와 통합의 정치’다. 위기마다 한국 정당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갈라지고 합쳐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는 의미다. 그는 권력 추구를 위해 이처럼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이합집산이 이뤄지는 현상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해설한다. 단기적 이해만 따지다 보니 정치가 일종의 선악론 게임으로 변질되고, 결과적으로 대중의 정치혐오만 부추긴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끔찍한 정치판을 바꿀 방법은 결국 이런 행태가 옳지 않다고 표로 꾸짖는 유권자의 힘이다. 어느 때보다 정치가 민망하고 절망적인 선거지만, 부끄럽지 않은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

조효석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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