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광희 (7) 아버지 목회에 그림자처럼 내조한 어머니

예배 때 추위에 떠는 할머니들 외투 사주고 교회 떠난 장로에겐 돌아오라 눈물로 호소

이준묵 목사와 김수덕 사모(두 번째 줄 왼쪽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1972년 해남읍교회 앞마당에서 교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예배를 드릴 때면 어머니의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성도들의 어려움을 살피기 좋은 뒷자리였다.

1950~60년대 교회에는 할머니와 과부들이 많았다. 할머니들이 돈이 없어 새벽기도와 수요 저녁 예배에 외투도 입지 못한 채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볼 때면 어머니는 몹시 괴로워하셨다. 그래서 4~5시간 걸리는 광주까지 가서 털실과 옷감을 구해 스웨터도 짜고 외투도 만들어 이들에게 주셨다. 그렇게 한 벌, 두 벌 전해지니 모든 성도가 어머니가 손수 짓거나 사주신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는 진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어머니는 “내가 마련해 준 옷을 입고 예배당에 오신 분들을 보면 가장 즐겁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목회에서 어머니는 말없이 행동하는 조용한 내조자였다. 장로님 한 분이 ‘해남읍교회에 다니지 않겠다’며 교회를 떠난 적이 있다. 그는 6·25전쟁 때 북에서 내려와 해남에 정착해 교회에 출석했다.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폐병에 걸린 장로님을 위해 약을 구해 주고 간호하셨다. 덕분에 건강을 되찾은 그는 아버지께 구두 수선을 배워 장사를 시작했다. 교회 일도 열심히 하셨다.

그런데 동갑인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다 문제가 생겼다. 당회에서 아버지의 제안을 자주 희화화하고 농담으로 넘기면서 엇박자를 내곤 했다. 너무 심해져 아버지가 꾸짖자 장로님은 “다른 교회도 얼마든지 있다”며 떠나셨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떡이며 과일 등을 이바지처럼 준비해 장로님 댁을 찾으셨다. 한 사람의 마음을 잃은 것은 천하를 잃은 것보다 더 큰 손해라는 신념이 있기에 주저하지 않으셨다. 장로님을 마주하자 어머니는 “교회로 돌아오라”며 간곡히 호소했다. 장로님도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울며 사과한 뒤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훗날 이 장로님은 어머니의 이해심과 겸허한 마음, 사랑과 포용이 마음을 움직였다고 간증하셨다.

어머니는 교육이 ‘미래의 투자’라 생각하시고 해남등대원 아이들이 한껏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셨다. 첫 열매는 1954년 해남중학교에 입학한 네 명의 아이들이었다. 1년 전 해남등대원이 문을 열 때 들어온 이들에게 어머니는 “너희 첫 열매 넷은 등대원의 희망이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받은 이 나라의 소망”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한 소년은 그날부터 설레는 꿈속에 살면서 문자 그대로 ‘꿈꾸는 소년’으로 성장했다고 고백했다.

네 명의 아이는 교과서 한 벌로 공부해야 했지만, 우등을 놓치지 않았다. ‘꿈꾸는 소년’은 아프리카 케냐에 선교센터를 세우고 에이즈와 한센병 환자들을 어루만지는 선교사가 됐다. 다른 소년들은 교수와 목사가 됐다.

1968년 2월 어머니의 일기에는 ‘섬김’이 주는 기쁨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운 일이라면 하기 싫어도 하기 어려워도 억지로라도 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할 일들을 더 제시해 주신다. 그리고 큰 기쁨을 주신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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