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못다 핀 한 송이 민들레 조선어린이들에게 축복의 홀씨 되다

생후 40개월 만에 조선 땅에 묻힌 선교사 자녀 에디스 홀

‘꼬마 숙녀’ 에디스 홀은 엄마 로제타 홀이 쥐여준 민들레꽃을 손에 쥐고 전염병으로 조선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난 9일 그가 묻힌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난 모습이다.

‘소중한 분, 아빠의 믿음은 어린아이의 믿음처럼 순진했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품 안에서 잠이 드는 것처럼 여기셨다. 1894년 11월 24일 토요일, 바로 해 질 녘에 아빠는 엄마와 손을 마주 잡고 빛나는 눈으로 엄마의 눈을 응시하면서 영원한 안식의 날에 깨어나기 위해 예수님 품에 잠드셨다(asleep in Jesus). 다음 날 아빠의 육신은 한강의 푸른 강둑에 안장되었다.’(닥터 로제타 홀 ‘에디스 마가렛 홀 육아일기’ 중)

캐나다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1860~1894)은 1894년 10월 청일전쟁으로 불바다가 된 평양에서 넘쳐나는 환자들을 돌보다 전염병에 걸려 그해 11월 순직했다. 서울로 후송된 그를 의료선교사 에비슨이 사력을 다해 살리려 했으나 깨어나지 못했다. 조선에 입국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그에겐 뉴욕 병원실습 중에 만나 결혼한 아내 로제타 홀(1865~1951)과 돌 지난 아들 셔우드 홀(1893~1991)이 있었다. 그리고 복중의 딸 에디스 홀도 있었다.

에디스 홀 (1895~1898)

엄마 로제타는 1895년 12월 18일자 에디스 육아일기에 아빠의 임종을 기록했다. 그때 제임스는 “당신을…사랑…해요”라고 했고 아들을 불러 ‘사랑과 그리움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로제타는 딸에게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미국과 한국 두 나라에서 어린이들의 친구로 알려졌던 아빠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에게 조용히 작별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단다.’

한강 푸른 강둑에 안장된 아버지

당시 ‘한강 푸른 강둑에 안장’된 제임스의 사진 한 장이 남아 전한다. 가난한 조선의 땅, 강은 더없이 황량하다. 제임스의 봉분은 잡풀이 듬성듬성해 보인다. 지금의 서울 마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다.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닥터 홀가(家) 묘역.

지난주 방문한 묘원은 코로나19 사태로 폐쇄돼 있었다. 폐쇄 기간 보수공사 중이었고 특별 허가를 받아 짧은 시간 동안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 황량한 무덤은 한국 선교를 기억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었다. 여동생의 죽음을 기억하는 오빠 셔우드까지 이곳에 묻혀 비로소 가족이 함께한 것이다. 모자는 평생 한국 선교와 의료 발전, 특히 전염병 퇴치에 앞장섰다.

불과 40개월을 이 땅에서 살다간 선교사의 딸 에디스. 조선에 파송된 많은 선교사 자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풍토병을 이기지 못했다. 제물포에서 평양을 배로 가는데도 며칠씩 걸리는 그 시대에 캐나다·미국~조선을 오갔으니 그 어린양의 안쓰러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엄마 품에 안긴 에디스. 왼쪽 어린이는 오빠 셔우드이다. 뒤편 두 사람은 박에스더(한국 최초 여의사)·박여선 부부. 미국에서 찍은 사진이다.

제임스가 순직한 후 로제타는 셔우드와 박여선·박에스더(훗날 한국 첫 여의사) 부부를 데리고 미국 동부 고향 리버티로 돌아갔다. 그리고 1895년 1월 18일 그곳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에디스를 낳았다. 아빠가 조선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에스더 이모’가 신생아 에디스를 씻겼다. 로제타는 그날 일기에 “사랑은 우주에서 파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요소다”라고 적었다.

그해 5월 로제타는 마음과 몸을 추슬러 남편의 뜻을 잇기로 하고 남편의 사역지 평양에서 지내기 위해 셔우드와 에디스의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또 박에스더의 유학 절차를 밟는가 하면 캐나다 동부 온타리오주 글렌부엘에 있는 아이들의 친가도 방문했다. 미국 여성해외선교회 뉴욕지부 연례회의 등에도 참석했다.

1897년 1월 에디스는 두 돌이 됐으며 어느덧 꼬마 숙녀가 돼 가고 있었다. 잠들 때나 먹을 때면 감사 기도를 따라 하곤 했다. 그해 10월 초 로제타는 시댁에 작별 인사를 하고 캐나다태평양철도를 따라 밴쿠버에 도착했다. 다시 조선 선교를 떠나는 여정이었다. 하지만 밴쿠버에서 에디스가 이질로 아팠다. 극동으로 향하는 바다는 거칠었고 배 안의 아이들은 토했다.

로제타는 한 달 만인 11월 10일 제물포항에 닿았다. 그러나 도착 직후 칭얼대던 에디스가 먹은 것을 토하고 밤새 열에 시달렸다. 폐렴 때문인지 말라리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열흘 만에 회복됐다. 그리고 에디스는 승무원 등에 업혀 승선했고 제물포-마포 간 강배를 타고 서울에 입성했다.

11월 24일 추수감사절. 세 식구는 양화진 아빠의 무덤에 다녀왔다. 3년 전 이날 아빠가 묻혔는데 그 태중의 에디스가 커서 아빠의 무덤 앞에서 손 모아 기도를 했다. 이듬해 에디스는 만 세 살 생일을 조선에서 맞았다. “조심하오” “어서어서(빨리빨리)”라는 한국말을 했다. 그리고 혼자 잠기도도 올렸다.

“이제 눕습니다. 하나님, 모든 한국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세요.”

에디스의 죽음, 어린이 병원 효시

엄마가 쓴 ‘에디스의 육아 일기장’으로 민들레꽃과 에디스의 관(棺) 사진을 붙여 애절한 그리움을 더했다.

2020년 4월 초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너른 땅에 이상하리만치 그 흔한 민들레꽃을 찾을 수 없었다. 묘원 서너 바퀴를 돌아서야 딱 한 송이 민들레꽃을 찾을 수 있었다. 1898년 5월 23일자 로제타의 일기에는 에디스가 좋아했던 조선의 민들레꽃과 한옥 마루에 놓인 서양식 관(棺) 사진 한 장이 붙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의 끝이구나. 나의 기다림과 나의 아픔 모두-이 작은 관 하나뿐. 그리고 다시 빈 팔이구나’라고 쓰여 있었다.

1900년대 말 제물포-진남포 간을 오갔던 해룡호. 에디스는 배 안에서 이질에 전염돼 사망에 이른다.

앞서 1898년 1월 말 에디스는 홍역의 고비를 한 차례 넘겼다. 엄마는 4월 29일 평양 부임을 위해 제물포에서 해룡호에 승선했고 5월 2일 평양에 도착했으나 에디스가 배 안에서 이질에 걸리고 말았다. 엄마는 딸의 투병기를 시간 단위로 남겼다. 끝의 기록.

“예수님은 에디스를 사랑하실까.”

에디스가 숨을 거둔 평양의 그래함 리 목사의 사랑채.

엄마 로제타가 세운 동대문부인병원 자리. 서울 숭인지문이 보인다.

에디스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네. 하나님이 저를 낫게 해주고 계세요.” 엄마는 에디스의 손에 그가 좋아하던 민들레 꽃을 쥐여주었다. 5월 23일 밤 에디스는 천국으로 향했다.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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