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LG배 기왕전 국내선발전에 참가한 바둑 기사들이 지난 13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2층 대국실에서 노트북으로 온라인대국을 벌이고 있다. 이번 선발전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전염을 예방하기 위해 기사들 간 거리를 둔 채 나무 바둑판 대신 온라인대국 프로그램 ‘사이버오로’로 14일 간 진행된다. 유창혁 9단(아래 사진의 왼쪽)과 이창호 9단 등 유명 기사들도 예외없이 온라인대국을 했다. 윤성호 기자·한국기원 제공

“시작하겠습니다.”

심판을 맡은 바둑원로 서봉수 9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국실에 ‘따다다닥’하는 소리가 일사불란하게 울렸다. 예년 같으면 단단한 나무 바둑판 위에 바둑돌이 놓이며 난 소리였겠지만, 이번엔 돌을 놓는 소리를 흉내낸 기계음이었다. 흑돌과 백돌을 가리는 ‘돌가리기’가 끝나자 바둑알 대신 마우스를 쥔 기사들은 바둑판 대신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화면에 비친 빛이 불편한지 모니터 각도를 고쳐잡는 사람도 있었다. 모니터를 보며 마우스를 움직여 승부를 가리는 모습은 흡사 프로게이머 같기도 했다.

바둑판 엎은 코로나19

한국기원은 13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2층 예선대국실에서 25회 LG배 기왕전 국내선발전을 열었다. 국내선발전은 이날부터 14일간 진행된다. 국내 랭킹을 기준으로 시드를 받는 6인 외 다른 16명은 예선을 거쳐야 한다. 이들은 중국과 일본의 시드 배정자 각각 3명, 대만의 1명, 전기 우승·준우승자와 와일드카드 1명 등 다른 16명과 합류해 6월 1일 개막하는 본선에 출전한다. 우승상금 3억원, 준우승상금 1억원으로 국내에서 열리는 개인전 대회로는 삼성화재배와 함께 가장 높다. 본래 한·중·일 3국에서 300명 이상 참가자가 국내로 모여 한꺼번에 예선을 치뤘지만 올해는 각각 대표를 선발한 뒤 본선을 진행하기로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전파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이날 기사 수십 명은 한국기원 대국장에 모여 온라인대국 프로그램 ‘사이버오로(烏鷺·바둑의 별칭)’를 통해 온라인 대국 총 21국을 치렀다. 대형 모뎀이 대국장에 설치된 가운데 약 1.5m 거리로 탁자와 의자, 노트북이 놓였다. 의자 사이의 거리는 정부가 권고한 ‘사회적 거리두기’ 기준 거리인 2m 정도였다. 한국기원 입구에는 분사형 소독장치가 설치됐고, 유증상자가 나타날 가능성을 대비해 야외에도 대국장이 천막으로 설치됐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각각 지난 11일과 6일부터 같은 방식으로 예선이 진행중이다.

공식 대국 수십 국이 한꺼번에 온라인으로 진행된 건 바둑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진기한 광경이다. 과거 2003년 6월에 송태곤 당시 4단과 쿵제 7단 사이 치러진 한·중 신인왕전 결승전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으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됐지만 둘 사이 치러진 단 2국뿐이었다. 그보다 앞서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열린 배달왕기전에서 대회 후원사 한국이동통신 때문에 결승 등 일부 경기가 PC통신을 통해 치러졌지만 이는 기사가 직접 온라인대국을 하는 게 아니었다. 기사들은 실제 대국처럼 나무 바둑판에 바둑알을 놓고 엔지니어가 온라인에 이를 실시간으로 올렸다.

일지매의 탄식 “이럴 줄 알았으면…”

예선장에는 ‘일지매’ 유창혁 9단과 ‘강태공’ 이창호 9단 등 유명 기사도 얼굴을 드러냈다. 54세로 이날 최고령자였던 유 9단은 온라인대국 통지를 알지 못하고 도착한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 9단은 “마우스를 만져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열리는 건 줄 알았으면 참가 안했다”고 불만을 털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평소 온라인대국을 거의 두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이 9단도 대국 시작 약 30분 전에 도착해 동료 기사들에게 질문을 하는 모습이었다.

이변도 일어났다. 유 9단은 우하귀(바둑판 우측 하단 모서리)에서 지난해에 입단한 양유준 1단에게 다섯 점이 잡히면서 불과 64수만에 돌을 던졌다. 이 9단은 김지명 2단에게 이겼지만 대국 과정에서 여러 번 마스크를 고쳐쓰는 등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두 베테랑이 상대한 기사는 모두 10대다. 이현욱 8단은 “최근에는 이름이 잘 알려진 고수가 비교적 무명 기사에게 예선에서 지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엄청난 이변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다”면서도 “나이가 있는 선배들은 컴퓨터 자체에 익숙하지 않거나 온라인대국을 아예 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불리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튿날인 14일에 대국한 이다혜 5단은 “일반 공식대국은 소위 ‘기가 쎈’ 기사들이 내뿜는 아우라에 상대방이 압도당하는 경우도 많다”며 “상대적으로 약자 입장에서는 마스크를 끼고 온라인대국을 하는 게 실력발휘에 좀 더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둑판에만 집중할 수 있어 바둑 수 외의 요소가 개입할 가능성이 적다는 설명이다. 이현욱 8단도 “과거 조훈현 사범(기사를 부르는 존칭)과 대국했을 때 아무말 안하셔도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며 “이번 예선에서는 그런 ‘강자 프리미엄’이 사라져서 젊은 기사들이 예선을 많이 통과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신예들 “나의 바둑 세상에 보일 기회”

이번 대회 예선이 기존과 다른 또 하나는 온라인으로 진행돼 기보가 남는다는 점이다. 또 일부 경기가 중계돼 일반 팬들도 대국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예선 대회 중 치러진 대국은 승패만 따질 뿐 기보를 남기지 않는다. 본선으로 올라가야 진행요원이 대국 중 기사들 옆에서 기보를 쓴다. 본선에 올라가기 힘든 일반 기사들의 경우 자신의 바둑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조차 버거운 셈이다. 올해 기준 프로기사의 수는 총 370여명에 달하지만 개인이 출전 가능한 국내대회의 수는 4개 정도다.

서중휘 6단은 “본선에 오르지 못하면 프로인데도 바둑을 보여줄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예선에서 명승부가 나오거나 개성 넘치는 기사가 흥미로운 수를 시험하더라도 알 수가 없다. 서 6단은 “예선 대국이 워낙 많다보니 주최 측이 일일이 기보를 기록하는 것도 인력이나 예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이번을 계기로 바둑계가 팬들에게 다가갈 방법을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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