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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4월도 잔인한 달?

김준동 공공정책국장 겸 논설위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주었다.’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다. 4월 하면 떠오르는 클리셰다. 433행에 달하는 장문의 시에는 1차 세계대전을 치른 당시의 황폐한 상황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생식의 기쁨조차 잃고 부활의 불가능함을 읊조리는 절망감이 곳곳에 묻어난다.

봄기운이 짙어지고 있지만 4월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가 절절히 공감되는 시기다. 온 천지가 꽃밭인데 코로나19가 가져온 일상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미래를 짊어질 학생들은 장기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주 고3·중3부터 온라인 개학을 시작했고 16일에는 고1·2학년, 중1·2학년, 초4∼6학년이, 다음 주에는 초1∼3학년이 온라인 개학한다.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길이기에 혼란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점차 개선되고는 있다지만 경험 부족과 온라인 수업 시스템 미흡 등으로 교사도 학생도 학부모도 당혹스럽다. 학교에서 받는 수업이라기보다는 마치 자기주도 학습 같다는 비아냥이 나온다. 학업 능률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가 줄고 있지만 시민들의 불안은 여전하다. 정부 우려대로 인구의 절반이 밀집한 서울 등 수도권에서는 신규 확진자가 꾸준히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유흥업소 등에서 대규모 집단 감염의 고리가 될 만한 위협적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느슨해지면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사회적 비용과 고통을 대가로 치를 수 있다며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지속적 동참을 당국이 호소한 이유다. 생활방역 전환 얘기가 나오지만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날은 멀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n번방’ 사건은 더 절망스럽게 만든다.

정치는 어떤가. 21대 국회의원 선거 기간 내내 정치 혐오를 부추기는 막말이 이어졌고 고소·고발전과 음모론도 난무했다. 유권자는 안중에 없었고 정책은 실종됐다. 경쟁하듯 ‘누가 누가 막말을 많이 하나’라는 3류 정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또 한 번 유권자에게 실망과 좌절을 안겨줬을 뿐이다. 선거는 끝났지만 정치가 희망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승패를 논하기 전에 반드시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한민족에게 4월은 수많은 상실과 희망이 섞인 그런 달이다. 일제의 모진 탄압을 뚫고 1919년 4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72년 전 4월에는 ‘제주 4·3 사건’이 있었고 60년 4월에는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이 있었다. 6년 전 4월에는 세월호가 전복되면서 단원고 학생 등 탑승객 476명 중 304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4월에는 강원도 고성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대형 산불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이런 절망 속에서도 언제나 미래를 향한 희망의 싹은 텄다.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 데 불을 댕겼고, 강원도 산불 때는 목숨을 걸고 화마와 싸운 수많은 시민이 있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선진국이라던 미국과 유럽이 바이러스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반면, 방역에 성공한 한국은 전 세계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다. 이 모두 축제용 꽃밭을 눈물 머금고 갈아엎은 시민들, 방역 전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들, 나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평범한 영웅들의 노력 덕분이다.

4월은 잔인하지만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기도 한다고 엘리엇은 노래했다. 신산스러운 삶이 이어지고 있지만 희망의 꽃은 곳곳에서 피어난다. 잔인한 이 시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간다면 언젠가 찬란한 날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황무지에서 라일락꽃이 활짝 필 그날 말이다.

김준동 공공정책국장 겸 논설위원 jd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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