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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n번방은 판결을 먹고 자랐다

한승주 논설위원


디지털 성범죄 피해 심각한데
법원 판결 터무니없이 가벼워
사법부가 성범죄자 양성하나
성착취물 제작·유포는 물론
동조하며 본 사람도 가해자
n번방 계기 관련법 개정하고
양형기준 국민 정서에 맞춰야


오거돈 부산시장이 전격 사퇴했다. 여직원을 성추행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났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1년 전을 보자. 버닝썬 게이트,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 장자연 리스트. 여성들의 취약한 인권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에 분노가 들끓었다. 당장이라도 세상이 바뀔 것 같았다.

그보다 1년 먼저 들불처럼 번졌던 성폭력 고발 운동 ‘미투(#MeToo·나도 당했다)’는 어땠던가. 대통령까지 나서 철저한 수사를 당부했다. 그런데 지금,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사회적 관심이 시들해졌다 싶을 때 피의자들은 슬그머니 집행유예나 무죄로 풀려났다. 그래서 일일이 말은 안 했어도 시민들은 아주 많이 화가 나 있었다.

지난달 ‘n번방 사건’이 수면 위로 올랐다. 국민일보의 기획시리즈 ‘n번방 추적기’를 통해서다. n번방은 미성년자가 포함된 여성 피해자를 노예처럼 부리며 강제로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이를 온라인에서 판매해 억대 수익을 올린 인격살인 사건이다. 불법 촬영된 영상을 보기 위해 돈을 내고 적극적으로 가입한 회원이 무려 26만명.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참아 왔던 분노가 폭발했다. 타이밍이 꽤 좋았다. 정치권이 관심을 가졌다. 마침 총선을 앞둔 시점, 표가 필요했던 정당과 의원들이 공분을 표하며 디지털 성범죄 관련 법안을 앞다퉈 내놓았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n번방과 유사한 박사방을 운영한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성범죄자로는 처음으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얼굴과 신상이 공개됐다. 관련 재판을 맡은 판사는 성인지 감수성 부족이라는 비난 속에 교체됐다.

가장 크게 불거진 건 양형 문제였다. 양형기준은 판사가 판결을 내릴 때 참고하는 잣대가 된다. 청소년성보호법 11조에 따르면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제작·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 법정형으로는 무기징역도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이에 한참 못 미쳤다. 그마저도 90% 정도는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일례로 최근 n번방 핵심 운영자 켈리는 항소심을 포기하며 징역 1년이라는 터무니없는 형량이 결정됐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9만개를 소지하고 이 가운데 2590여개를 판매해 8700여만원을 챙겼는데도 말이다. 사법부가 성범죄자를 양성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솜방망이 판결들이 모여서 n번방의 토대가 됐다.

디지털 성범죄는 온라인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며 2, 3차 피해를 일으킨다. 어린 피해자들은 부모에게조차 말 못 하고, 평생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정말 죽을 것 같은 절망과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그런데도 법원의 판결은 초범이다,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줄줄이 가벼운 처벌이다. 국민의 법 감정, 법 상식과는 동떨어져도 한참을 떨어졌다. 미국에서는 불법 성착취물을 제작하면 20년 정도의 실형이 선고된다. 한국만 유난히 처벌이 약한 것이다. 이렇다 보니 SNS에서는 ‘#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는 해시태그가 이어지고 있다. n번방에 대한 분노가 사법부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피의자들은 약한 판결을 비웃으며 더욱더 음지로 숨어든다. 보안이 철저한 해외 사이트 텔레그램이나 디스코드 등으로 옮겨가고 있다. 단순한 호기심 차원에서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의 말은 그래서 틀렸다. 이들은 확실한 의도를 갖고 복잡한 인증 절차를 거쳐 정식 회원이 됐다. 이들이 본 것은 무엇이었나. 포르노와 몰카를 넘는 수준이다. 성적으로만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동물을 괴롭히듯 노예처럼 부린 폭력적인 영상이었다. 잔인하고 끔찍한 영상을 만든 사람이 있고, 돈을 내고 본 사람이 있다. 심지어 지금도 은밀한 플랫폼에서 n번방 영상이 공유되고 있다. 그 방에서 말리지 않고 침묵 속에 동조했던 모두가 가해자다. 그런데도 현행법은 영상물 소지 자체는 형량이 낮아 초범의 경우 벌금형에 그치고 있다.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느슨한 법을 개정하고 양형기준도 높여야 한다. 한 번이라도 디지털 성범죄에 연루되면 신상이 공개돼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경각심을 갖게 해야 한다. 이들이 저지른 것은 성범죄이자 인격살인임을 알게 해야 한다.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n번방이 더 이상 판결을 먹고 자라서는 안 된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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