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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하노이 만시지탄

조성은 정치부 기자


가끔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2019년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있었던 일을 돌이켜본다. 마이클 코언(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의 미국 하원 청문회가 하루만 늦게 열렸다면, 존 볼턴(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느닷없이 회담장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아니면 그저 하노이 날씨가 맑게 개어 메트로폴 호텔 정원을 거닐던 트럼프 대통령이 따사로운 햇살에 취해 까닭 없이 기분이 들떴더라면. 그래서 그가 애용하는 샤피펜의 뚜껑을 열어 테이블 위에 놓인 합의문에 흔쾌히 자기 이름을 써넣었더라면 어땠을까.

북한 문제를 잘 아는 전문가를 만나면 한 가지를 꼭 묻는다. 그날 두 정상이 합의문에 서명했을 가능성을 얼마 정도로 보느냐고. 당시 합의문 내용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와 관계없이 부정적인 답을 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적어도 50%였고 많게는 99%까지 타결 가능성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북·미 협상단 차원에서 큰 틀의 합의가 이뤄져 트럼프 대통령이 1%의 변덕만 부리지 않았다면 성사됐을 거란 얘기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 카드를 미국에 내밀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언제 적 영변이냐”는 말도 있지만 여전히 그곳은 북한 핵 능력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70%에 이른다는 시각도 있다. 무엇보다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한 재처리시설은 북한에서 영변뿐이다. 다른 재처리시설이 있을 거라는 의심을 할지도 모르겠으나 그 거대한 설비를 감시자산에 들키지 않고 새로 짓는 건 불가능하다. 설령 시설을 몰래 지어 돌리더라도 굴뚝이 뿜어내는 연기를 숨길 수가 없다.

북한이 핵 개발 마지막 단계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 중 하나는 핵탄두 소형화다. 북한에 핵무기는 대남보다는 대미 협상 카드에 더 가깝다. 따라서 핵탄두를 작고 가볍게 만들어 장거리 미사일에 싣고 미국 본토까지 날릴 능력을 입증해야 협상력이 생긴다. 그런 핵탄두를 만들기 위해서는 플루토늄이 아니면 마땅한 재료가 사실상 없다. 고농축우라늄으로도 핵탄두를 만들 수는 있지만 부피가 크고 무게도 무거워 장거리 미사일에 탑재하기는 어렵다.

북한은 2016년 3월 자신들이 핵탄두 소형화에 성공했다며 둥근 모양의 금속 구체를 공개한 바 있다. 북한 측은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탄두 형태로 미뤄 자신들이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에 집중하고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해석됐다. 북한은 이듬해 9월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다며 호리병 모양의 탄두를 공개했다. 당시 전문가들은 1년 전에 공개했던 둥근 플루토늄 탄두에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장비를 붙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만약 북한이 공약했던 대로 영변 핵시설 전체를 외국 전문가 입회하에 완전히 폐기한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자국 영토를 위협할 만한 핵무기가 더는 늘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북한의 핵실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단 선언으로 시작한 이른바 ‘미래 핵’ 폐기 프로세스가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워싱턴으로 돌아가서 지지자들을 향해 “미국을 겨냥한 모든 위협이 사라졌다”며 한껏 으스댈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런 미래는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진짜로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 때문에 합의가 틀어졌다면 실패 원인을 찾고 책임을 묻는 것도 무의미하다. 북한 당국이 당시 실무 협상을 맡았던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 특별대표와 김성혜 노동당 통일전선부 통일책략실장을 처벌했다는 설이 도는데 사실이라면 부질없는 짓이다. 코언 청문회는 왜 하필 그날 열렸을까, 볼턴은 어째서 갑자기 하노이에 모습을 드러낸 걸까, 하노이 날씨는 왜 그렇게 꿀꿀했을까를 따져보는 쪽이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한반도에 사는 7000만명의 운명이 어떻게 이런 사소한 변수에 오락가락할 수가 있나 생각하면 당혹감을 느낀다.

조성은 정치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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